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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의 의미를 망쳐 버린 부활절 퍼레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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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대로믿는사람들 <2023년 05월호>
한국 기독교계가 지난 4월 9일 소위 “부활주일”에 서울 광화문광장과 서울광장 일대에서 1만여 명이 참가한 가운데 연합 “부활절 퍼레이드”를 개최했다. 작년에도 “부활절 퍼레이드”라는 이름의 행사가 실내 음악회 위주로 진행된 적이 있으나, 주최측은 올해의 “부활절 퍼레이드”를 기념비적인 첫 행사로 간주한다. 왜냐하면 부활절을 맞아 한국 기독교계가 하나 되어 서울 도심에서 대규모 퍼레이드를 펼친 건 한국 개신교 140년 역사상 처음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행사는 동성연애자들이 길거리에서 퍼포먼스를 하고 퍼레이드를 하며 그들의 추함을 드러내듯이, 부활의 진정한 의미를 망각한 한국 기독교계가 퍼포먼스나 하고 퍼레이드나 함으로써 자기들의 어리석음을 만천하에 드러낸 행사일 뿐이다. CTS기독교TV(회장 : 감경철)가 주관한 이날 행사에는 사람들의 눈길을 끌 만한 다양한 도구들과 체험마당이 제공됐으며, 참여 시민들에게 다양한 퍼포먼스를 제공했다. 한국 기독교계는 구원받지도 못하고 지옥으로 달려가는 세상 사람들의 관심과 시선을 받고 싶어서 서슴없이 퍼포먼스와 퍼레이드를 벌이는 어릿광대가 된 것이다.한국 기독교계를 어릿광대로 전락시키며 “부활절 퍼레이드”를 총괄 주관하고 있는 “CTS 문화사업본부”는 “모두가 하나 되어 부활의 기쁨을 노래하자”는 슬로건 아래 “퍼레이드 행사”와 “기념 음악회”로 프로그램을 구성하였다. 특히 “퍼레이드 행렬”에는 “라퍼커션의 드럼 행진,” “유니타임의 외발자전거 행진,” “천무응원단의 스턴트 치어리딩 쇼,” “K타이거즈의 태권도 격파 시범” 등의 프로그램이, “기념 음악회”에는 “클래식,” “CCM과 워십,” “연합 합창,” “갈라 뮤지컬,” “K-POP” 등의 프로그램이 진행되었다. 주최측인 “사단법인 한국교회총연합”은 이런 것들이 진정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과 상관 있다고 생각한 것인가?
“부활절 퍼레이드” 관계자들의 발언은 그들이 결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증인들”이 될 수 없음을 확연히 드러낸다. “부활절 퍼레이드”를 기획, 주관한 공동대회장 감경철 회장은 “부활절을 교회와 그리스도인들만의 행사가 아니라 일반 시민에게 다가가는 축제로 승화시키고 싶었다. 이번 퍼레이드를 통해 모두가 함께 부활의 기쁨을 누리게 되어 기쁘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이 행사로 그리스도인들과 일반 시민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기쁨을 함께 누렸는가? 일반 시민들 중 그 누가 이 행사를 통해 자신의 죄를 위해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사실을 믿고 구원받아 부활의 기쁨을 누렸는가? 그는 또한 “올해 처음으로 열린 부활절 퍼레이드를 잘 보완하고 확장해서 전국의 크리스천은 물론 모든 국민이 함께 즐길 수 있는 보편적인 문화 축제가 되도록 최선을 다하겠다”고 말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구원받지도 못한 세상 사람들과 즐기라고 죽으시고 부활하셨단 말인가?
이영훈 공동대회장(한국교회총연합 대표회장)은 “우리 사회의 진정한 화합과 하나 됨을 위한 행진이었다. 나뉘고 갈라진 대한민국 사회가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과 낮아짐을 본받아 서로를 이해하고 용서하며 하나가 되도록 노력하자”고 제언했다. 소위 목사라는 자가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상의 화합과 하나 됨을 위해 죽으시고 부활하셨다고 한 것이다. 주님의 부활을 현 세상의 통합과 관련시키는 망상은 이 세상의 신인(고후 4:4) 사탄이 자신에게 넘겨진(눅 4:5,6) 악한 현 세상을(갈 1:4) 통치하기 위해 자신의 종들을 이용해 인류를 파멸시키는 전략이다. 이러한 계략에 협조한다면 한국교회총연합회가 사탄의 종들이 아니고 무엇인가?
퍼레이드에 직접 참여한 새에덴교회 이종민 목사는 “깃발과 현수막 등 행렬에 활용할 도구들을 성도들과 함께 제작하며 세상으로 나아가는 부활의 참 의미를 체험하는 귀한 과정이었다”고 말했는데, 그가 말한 “세상으로 나아가는 부활의 참 의미”라는 것이 무엇인가?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을 그저 세상 사람들의 호기심을 자극하는 볼거리로 만드는 쇼 퍼레이드가 “부활의 참 의미를 체험하는 귀한 과정”이었다는 말인가? “부활절 퍼레이드”가 진행되고 있는 동안 구경하고 참여하는 많은 사람들이 있었지만, 그들에게 복음전도지를 나눠 주는 사람은 한 사람도 눈에 띄지 않았다. 진정으로 부활의 참 의미를 체험하려면,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부활해야 한다. 즉 자신이 죄인임을 인정하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 죄를 대신해서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고 부활하신 사실을 믿어야만 한다(롬 10:9,10). 그래야 거듭나게 되는 것이며, 그리스도의 부활에 동참하게 되는 것이다.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의 모양으로 함께 심겨졌다면 또한 그의 부활하심의 모양과 같이 되리라』(롬 6:5).
한국 기독교계가 기념하는 “부활절”(Easter)은 그 기원부터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과 관련이 없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기념하는 날로 잘못 알려진 부활절은 “이스터”(Easter)라는 이름에서도 볼 수 있듯이 이교도들이 숭배하던 여신을 기념하는 축제가 기독교로 유입되어 생겨난 것이다. 그 여신의 이름은 에오스트레(Eostre), 오스테라(Ostera), 아스타르테(Astarte), 이쉬타르(Ishtar) 등 지역에 따라 조금씩 다르게 불렸고, 이 이름에서 “이스터”라는 명칭의 축제가 생겨났다. 이 여신들은 지역에 따라 봄, 생명, 생식, 다산 등 상징하는 바는 조금씩 달랐으나, “하늘의 여왕”을 숭배하는 사상의 변형일 뿐이다. 이렇듯 유럽 각 지역의 이교도들이 가지고 있던 여신 숭배 사상을 로마카톨릭이 교회 안으로 끌어들인 것이 부활절이다.
부활절뿐만 아니라 부활절 달걀과 부활절 토끼 또한 비성경적인 이교도들의 전통이다. 부활절 달걀은 고대 바빌론인들의 알 숭배 사상에서 비롯되었는데, 이 또한 여신 숭배와 관련된다. 고대 바빌론인들의 전설에 따르면, 하늘로부터 거대한 알이 유프라테스 강에 떨어졌는데, 그 알에서 한 여신이 태어났다고 한다. 이 여신이 지역에 따라 아스타르테, 이쉬타르 등의 이름들로 불리며 숭배되었고, 이 전설에 따라 알을 그 여신의 상징물로 여긴 데서 부활절 달걀이 비롯되었다. 그러한 여신을 섬기던 지역들에서 달걀은 부활의 상징과 숭배의 대상이 되었고, 고대 이집트와 페르시아에서는 색을 칠한 달걀을 먹으며 기념하기도 했다. 또한 이스터는 봄의 축제이기 때문에 왕성한 생식(生殖)과 다산(多産)을 기원하는 의미에서 생식력이 왕성한 토끼를 그 상징물로 사용했는데, 이것이 “부활절 토끼”의 유래이다. 이 “이교도의 부활절” 풍습은 로마카톨릭에 의해 예수님의 부활과 교묘히 접목되면서 기독교계로 유입된 것이다.
로마카톨릭이 이교도 축제를 끌어들여 마치 기독교의 전통처럼 만들어 놓은 “부활절”을 아무런 성경적 비평 없이 그대로 수용하여 지킨다면, 그 교회는 인간들이 만든 죽은 전통을 지키는 죽은 교회일 뿐이다. 『그것들은 사람의 전통과 세상의 유치한 원리를 따른 것이며 그리스도를 따른 것이 아니니라』(골 2:8). 한국 기독교계는 성경에 없는 쓸데없는 “부활절” 전통을 지킬 뿐만 아니라, “부활절 연합예배”라는 행사도 매년 개최해 왔는데, 이제는 하물며 로마카톨릭도 하지 않는 “부활절 퍼레이드”까지 벌이며 세상의 진창에서 뒹굴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성령께서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능력을 받으리니 그러면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게 증인이 되리라』(행 1:8). 사도들은 주님께서 승천하신 이후 이 말씀에 따라 신실한 증인들의 삶을 살았다. 자신들을 『주의 부활의 증인』이라고 했으며(행 1:22), 사도 베드로는 자신을 가리켜 『그리스도의 고난의 증인』이라고 했다(벧전 5:1). 당신은 주님의 사도들이 성경에서 주님의 부활을 가지고 세상 앞에서 쇼를 하는 것을 보았는가? 그들의 발자취를 따르는 그리스도인이라면 세상이 주는 고난에 동참하면서 주님의 부활을 증거하는 증인들로 살아야 한다. 『그러므로 너는 우리 주의 증거나 그의 죄수 된 나를 부끄러워하지 말고, 하나님의 능력에 따라 복음을 위하여 고난의 동참자가 되라』(딤후 1:8).
사도들은 “부활절”을 지키지 않았다. 이 점에 주의하지 않고 이교도의 절기를 지키며 “부활절 퍼레이드” 같은 행사들을 벌인다면, 그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는 부활의 증인이 될 수 없다. 옛 바빌론 종교가 교회의 탈을 쓰고 나타난 로마카톨릭처럼 날과 달과 절기와 해를 헛되이 지키는(갈 4:10) 우상 숭배자가 되고 마는 것이다. 그런 “부활절”을 지키는 것은 사도 바울이 경계하고 경고한 『약하고 천한 초등 학문으로 다시 돌아가 거기서 다시 종 노릇』(갈 4:9) 하는 것에 불과하다. 그런 헛된 절기를 지키기 위해 시간들을 낭비하지 말라. 그리스도인이라면 하나님의 말씀을 들고 세상에 나가 복음과 진리를 전파하는 그리스도의 훌륭한 군사가 되어야 한다. B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