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진리의 말씀을 올바로 나누어 자신이 하나님 앞에 부끄럽지 않은 일꾼으로 인정받도록 공부하라(딤후 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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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나안 청년” 잡으려다 통째로 흔들린 한국 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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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대로믿는사람들 <2024년 03월호>

손주영 / 킹제임스성경신학교 강사



코로나 사태가 종식된 후, 많은 교인들은 “대면 예배”로 돌아오기보다 그대로 “온라인 예배”에 머물기를 선택했다. 이로 인한 소위 “가나안 교인” 문제, 즉 교회에 “안 나가”는 교인들이 많다는 것은 기독교계의 주요 이슈가 된 지 오래다. 특히 상대적으로 “온라인 공간”에 더 익숙한 청년층의 교회 이탈은 심각한 수준이다. 20, 30, 40대 교인들 중 “가나안 교인”은 각각 45%, 35%, 36%인 것으로 나타났다. 이는 전체 “가나안 교인”의 비율인 26.6%를 훨씬 상회하는 수치이다. 청년 교인들을 중심으로 교회에는 나가지 않고 여러 교회의 “온라인 예배”를 그때그때 취사선택하며 떠돌아다니는 이들이 급증하자, 급기야 “플로팅 크리스천,” “OTT 크리스천”이라는 용어가 “트렌드”를 정의하는 용어로 부상하기까지 했다. 태어날 때부터 디지털 기기에 둘러싸여 있었던 “디지털 네이티브” 청년 세대는, “온라인 예배”가 불러온 변화에 기성세대의 예측 범위를 아득히 벗어난 적응력을 보여 주고 있는 것이다.


새로운 세대를 중심으로 한 위와 같은 변화의 바람은, 세계를 휩쓸고 있는 생성형 AI 열풍을 만나 더더욱 거세지는 모양새다. 지난해 해외에서는 챗GPT에 성경을 학습시켜 개발된 “텍스트 위드 지저스”(Text With Jesus)라는 앱이 공개되기도 했고, “AI 예수”가 모 실시간 동영상 스트리밍 플랫폼에 등장하기도 했다. 국내에서도 챗GPT 기반의 “주님AI”(“초원”으로 개명함)라는 앱이 출시되었고, 청년 세대의 폭발적 관심을 받고 있다. 2030 사용자의 비율이 60%가 넘는다는 이 앱은 매월 활성 사용자 수가 3,4만 명에 이르고, 하루에 올라오는 질문만 해도 1만 개라고 한다. 직장, 연애, 금전 등에 관한 조언부터 “성형하는 것은 잘못인가요?”, “십일조는 왜 해야 하나요?”, “바이러스도 하나님께서 만드셨나요?” 등의 질문에 이르기까지, 이 시대의 청년 교인들은 포털 사이트나 유튜브 검색을 넘어 AI까지 활용하여 교회 바깥에서도 충분히 그들의 고민과 궁금증을 해소하고 있는 것이다.


재미있게도 “챗GPT,” “주님AI(초원),” 그리고 “인간”에게 이러한 청년 교인들의 풍조에 대해 직접 물어본 뒤, 가상 좌담 형식으로 재구성하여 작성한 기사가 지난 1월 기독교 언론 아이굿뉴스에 실렸다. 기자가 교회를 떠난 청년들이 어떻게 하면 돌아오겠냐고 묻자, “챗GPT”는 청년들의 목소리를 반영하고 “전통적 예배를 넘어 참신한 예배와 프로그램” 그리고 “디지털 미디어와 기술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했다. 비록 챗GPT가 때로는 맥락에서 벗어나거나 사실이 아닌 내용을 그럴듯하게 이야기하는 오류(할루시네이션)를 생산하기도 한다지만, 이는 전혀 “오류”가 아니었고 오히려 “학습”의 결과물이었다. 새에덴교회의 소강석 목사는 재작년 자신의 교회에서 열린 컨퍼런스에서, 교회들이 폐쇄적인 마인드를 극복하고 수용성을 높임으로써 온라인과 오프라인을 병행하는 하이브리드형 교회로 나아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목회데이터연구소의 지용근 대표는 누가 먼저 하이브리드 교회 전략을 취하느냐에 따라 미래세대 선점 여부가 갈릴 것이라고 했고, 작년에는 한국기독교학회와 장신대 글로컬현장교육원이 “뉴노멀시대 하이브리드 목회, 이렇게 합시다”라는 주제로 세미나를 개최하기도 했다.


앞서 소개한 좌담의 “인간” 역이었던 실천신학대학원대학교 조성돈 교수 또한 동일한 시각을 내비쳤다. 그는 좌담을 마무리하며 “교회론에 대한 논의가 필요합니다. 코로나 이후 변화된 환경에서 교회는 어떤 곳이며 어떤 곳이 되어야 하는지 제대로 짚고 넘어가는 작업이 필요합니다.”라고 이야기했다. 한마디로 디지털 공간이 등장함에 따라 이제 교회란 무엇인가에 대한 과거의 인식이 붕괴하고 있다는 뜻이었다. “주님AI(초원)”는 이러한 담론에 있어 “챗GPT”와 “인간”보다 한층 “진보한” 답변을 내놓았다. “신앙은 있지만 종교 생활은 하지 않는 청년들이 종교 기관에 도전하는 것으로 인식해서는 안 된다”면서, “영성은 지극히 다양한 방식으로 나아갈 수 있다”는 것, 그리고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으로서 우리의 역할은 개인의 다양한 영적 여정을 포용하고 이해하는 동시에 하나님의 사랑과 진리의 메시지를 겸손하게 나누는 일”이라는 것이 “주님AI(초원)”의 시각이었다. 물론 이 또한 “주님AI(초원)”의 독자적인 생각은 아니다. 교회에 나오지 않고도 얼마든지 영적으로 성장할 수 있으니 애당초 그런 청년들을 문제시하지 말자는 의견이 교계 일각에서 제기되는 것은 어제오늘 일도 아니다. 종합해 보건대, “챗GPT,” “주님AI(초원),” 그리고 “인간” 모두가 “이미 거스를 수 없는 기술의 흐름에 역행하려 들지 말고, 청년들이 원하는 것을 수용하여 해법을 찾자”는 데는 뜻을 같이했던 것이다.


“편의성”과 “새로운 상황”을 고려하여 기존의 예배를 재정립하고자 하는 시도는 성경에도 나온다. 바로 “여로보암의 금송아지”가 그것이다. 『이에 왕이 계략을 꾸미고 금송아지 둘을 만들어 백성에게 말하기를 “예루살렘에 올라가는 것이 너희에게 너무 수고스럽도다. 오 이스라엘아, 너를 이집트 땅에서 인도해 내신 네 신들을 보라.” 하고 그가 하나는 벧엘에 두고, 다른 하나는 단에 두니라』(왕상 12:28,29). 물론 여로보암의 시도는 하나님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형상을 만들거나 숭배하지 말라는 십계명의 둘째 계명을 어기면서, 그리고 솔로몬 성전이라는 하나님께서 승인하신 경배의 장소를 벗어나서 행해지는 종교 의식은 하나님을 오히려 진노케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성경에 무지했던 백성들은 이런 점을 잘 몰랐기에 그저 편한 것을 쫓았다. 백성들의 무지가 영적 지도자의 오도와 결합되자 걷잡을 수 없는 파멸이 뒤따랐다. 이로 인해 결국 북왕국 이스라엘은 단 한 번의 제대로 된 부흥도 경험하지 못한 채 망국의 길로 접어들고 말았던 것이다. 『주께서 이스라엘을 다윗의 집으로부터 찢으시니 사람들이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을 왕으로 삼고 여로보암이 이스라엘을 주를 따르는 데서 몰아내어 그들로 큰 죄를 짓게 하였더라』(왕하 17:21).

사실 성경 속 하나님의 사람들은 여로보암과는 반대로, 회중의 “편의” 따위는 안중에도 없는 듯한 모습을 종종 보였다. 선지자 사무엘은 갑자기 천둥이 치고 비가 오는 상황에서도 설교를 계속했다(삼상 12:16-25). 바울은 졸고 있는 회중이 있다 해서 설교를 짧게 끝내지 않았고, 오히려 창가에 앉아 졸던 성도가 떨어져 죽을 때까지 설교했다(행 20:9). 의자도, 음향 장비도, 건물도 없이 야외에서 설교를 들어야 했던 시절이었음에도, 회중의 편의를 고려하는 일 없이 아침부터 정오까지 내리 그 자리에서 말씀이 선포된 일도 있었다(느 8:1-8).


따라서 “새로운 시대의 요구”를 반영하자면서 “교회에 대한 재정의”를 운운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과는 무관한 일이라고 하겠다. 우리는 교회에 대해 새로운 정의를 내려야 할 필요가 없다. 성경이 내린 정의를 따르면 되기 때문이다. “교회”를 뜻하는 헬라어 단어 “에클레시아”는 “불러냄을 받은 모임”이라는 뜻이다. 교회의 본질은 사람들의 “모임”이다. 그래서 성령님께서 강림하심으로써 이 땅에 최초의 신약 지역 교회를 세우실 때는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행 2장). 성령님께서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 즉 “우주적인 교회” 안으로 성도들을 넣으시는 데는 시공간적 제약이 없다. 그러나 각 지역 성도들의 모임, 즉 사람들이 흔히 “교회”라고 하면 떠올리는 “지역 교회”를 형성하시는 데는 성도들이 같은 시공간에 존재해야 한다는 제약이 따랐던 것이다. “교회”는 매주 첫날에 성도들이 함께 빵을 떼고 말씀을 듣고자 형성되는 지역 “모임”이다(행 20:7). 주 예수께서도 “교회”에 관해 언급하신 후에 곧바로 두세 사람이 그분의 이름으로 함께 “모이는” 곳 가운데 그분께서 계실 것이라고 말씀하셨다(마 18:15-20). 하나님께서는 마지막 날이 가까워 올수록 모이는 것을 저버리지 말라는 지침까지 주셨다(히 10:25). 그러므로 교회란 결코 “온라인 공간”의 영역으로 확장될 수 없다. 두세 사람이라도 그분의 이름으로 “모이는” 곳이어야 “교회”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필자는 한국 교회의 인사들이 위의 말씀들이 성경에 있는 것을 몰라 “하이브리드 교회”니, “교회론에 대한 새로운 논의”니 하는 헛소리를 늘어놓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런 입장을 취하는 것은, 그들이 “두려워하는 것”이 하나님과 그분의 말씀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들에게 가장 두려운 것은, 잘 어르고 달래면 코로나 사태 이전처럼 교회로 돌아올지도 모르는 “가나안 청년”들이 아예 “기독교”의 영역을 떠나버리는 일이다.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설정해 두신 “옛 지계표”를 옮기면 되겠다는 생각에 이른 것이다. 그들의 “영역”을 조금이라도 넓힐 심산으로 말이다. 욕심에 눈이 멀어 진리를 거스르면서도 “하나님의 일”을 하고 있다는 착각 속에 빠져 있는 것이다(고후 13:8).


청년들이 교회 바깥으로 나가버린 까닭은 본질상 “코로나 사태”나 “온라인 예배” 탓이 아니다. 교회들이 제대로 된 복음을 전하지 않은 까닭에 구원받지 못한 채 예배당에 앉아 있던 청년들이 “코로나 사태”라는 바람이 불자 그 뿌리 없음을 드러냈을 뿐이다. 교회들이여, 제대로 된 “청년 사역”을 펼치고 싶은가? 그렇다면 “청년들의 요구”를 들어줄 생각을 하기 앞서, “하나님의 요구”인 “구원의 복음과 진리의 지식”(딤전 2:4)을 전파하는 일부터 제대로 하도록 하라! B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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