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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킹제임스성경>에 도전하는 “가짜” 번역본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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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대로믿는사람들 <2024년 04월호>
장준익 / 킹제임스성경신학교 강사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올바로 보존된 자국어 성경을 갖기 바라신다. 하나님의 자녀들이 자국의 언어로 된 그 성경을 읽음으로써 하나님과 진지하게 교제하고, 성령의 칼인 그 성경으로 혼들을 이겨오며, 그리스도의 군사로서 사탄과의 전쟁을 승리로 이끄는 삶을 살기를 원하시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하나님께서는 그분께서 일으키신 하나님의 사람을 통해 그 나라의 성경을 번역하게 하시는 것이다. 국가마다 “최종권위”로서의 자국어 성경이 정립되는 과정에는 차이가 있을 수 있으나, 한 언어를 사용하는 국가라면 오직 하나의 자국어 성경이 “최종권위”인 것은 당연하다. 여러 번역본이 권위를 인정받으면 번역의 차이에 따라 교리와 실행에 혼란이 오게 되는데, 하나님은 혼란의 창시자가 아니시기 때문이다(고전 14:33). 하나의 언어에 하나의 성경만을 주셨다는 믿음은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지극히 건전한 상식이다. 그리고 사탄은 항상 이 “최종권위”를 훼손시키기 위해 “사탄의 하수인들”을 이용하여 “가짜” 번역본들을 만들어 왔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말씀이자 믿음과 실행의 “최종권위”로서 독일에는 <루터성경>, 프랑스에는 <올리베탄 성경>, 이탈리아에는 <디오다티 성경>, 에스파냐에는 <레이나 발레라 성경>, 영국과 미국에는 <킹제임스성경>, 한국에는 <한글킹제임스성경>을 주셨다. 문제는 이렇게 하나님께서 주신 성경이 있는데도 새로운 번역본들이 계속 나오고 있다는 데 있다. 유럽에서는 독일만 하더라도 최근에 <슐라흐터 비벨>(2000), <취흐너 비벨>(2007), <노이에 게퍼 위버제충>(2011)과 같은 변개된 성서들이 나왔고, 영어권에서도 <영어표준성경>(ESV, 2001), <세계영어성경>(WEB, 2006) 등이 나왔다. 한국에서도 <개역개정판>(1998), <쉬운성경>(2001), <우리말성경>(2004), <쉬운말성경>(2012), <메시지성경>(2015) 등과 같은 변개된 성서들이 꾸준히 출간되고 있다. 지속적으로 새로운 것을 내놓음으로써 사람들의 시선과 마음을 빼앗는 사탄의 계략은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
사탄은 변개된 원문에서 번역된 성서들을 계속해서 내놓는 것에 머물지 않고, 바른 원문에서 “잘못 번역된” 성서들도 꾸준히 내놓았다. <한글킹제임스성경>이 하나님께서 이 민족에게 주신 유일한 “최종권위”임에도 불구하고, 영어 <킹제임스성경>을 번역했다고 하는 <권위역성경>(1996), <킹제임스흠정역>(2000),
흠정역의 번역자 정동수는 자신의 저서 <정동수 목사의 킹제임스 흠정역 성경 이야기>에서 「저나 제 동료들은 한국의 대표성경인 개역(개정)성경을 까닭 없이 폄하하려 한 적이 없습니다. 이것은 개개인의 믿음의 문제이지 무력으로 밀어붙일 문제가 결코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침례교, 장로교, 감리교 등의 차이로 교리적 해석이 다른 문제나 실행이 다른 문제는 서로 인정하고 복음 안에서 각자 믿음대로 행하면 될 것으로 판단합니다.」라고 말했다. <한글킹제임스성경>이 나오기 전까지 우리나라는 바른 성경이 없어서 바른 교리를 정립하지 못하고, 기형적인 기독교 문화가 뿌리 깊이 박혀 하나님의 뜻을 올바로 실행하는 교회가 전혀 없었다. <한글개역성경>에서 비롯된 잘못된 교리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올바로 구원받지 못하고 죽어서 지옥에 간 것이다. 그런데 변개된 성경을 질책하지 않고, 교리적 해석이 다른 것을 서로 인정하고 각자 믿음대로 행하면 된다는 생각을 가진 자가 성경을 바르게 번역할 수 있었겠는가? 하나님께서 그런 사람을 번역자로 쓰셨겠는가?
정동수는 성경적 교리인 “재창조”를 부인하기 위해 창세기 1:2인 『땅은 형체가 없고 공허하며 어두움이 깊음의 표면에 있으며 하나님의 영은 물들의 표면에서 거니시더라.』(And the earth was without form, and void; and darkness was upon the face of the deep. And the Spirit of God moved upon the face of the waters.)의 해석에 있어서도 미국의 배교한 근본주의자들처럼, 창세기 1:2을 1:1의 부연 설명(이접적 구절)이라고 주장한다. 즉 태초에 하나님께서 하늘과 땅을 창조하셨을 때, 땅은 형체가 없고 공허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무엇을 창조하신 것인가? “형체가 없는 공허”를 창조하셨다는 것인가? 그러면서 그는 여러 가지 이접적 구절을 예로 든다. 그러나 정작 And로 시작하는 이접적 구절은 하나도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왜냐하면 And로 시작하는 이접적 구절은 없기 때문이다. And는 중학생이면 다 아는 대표적인 “등위접속사”이다. 즉 앞뒤의 문장이 서로 종속성 없이 대등한 경우와 사건이 시간의 경과에 따라 순서적으로 일어나는 경우에 사용된다. 그러므로 And로 시작한 문장은 부연 설명을 하는 “이접적 구절”이 될 수 없다. 정동수는 잘 알지도 못하면서 미국의 배교자들을 따라하는 “앵무새”에 불과한 것이다.
정동수는 성경을 정직하게 번역하지 않고 자신의 “침례에 의한 구원” 교리에 따라 번역하였다. 베드로전서 3:21인 『물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으로 인하여 이제 우리를 구원하는 모형이니, 곧 침례라. (이것은 육체의 더러움을 제거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향한 선한 양심의 응답이라.)』(한글킹제임스성경)를 「그 일과 같은 모형 곧 침례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로 말미암아 이제 또한 우리를 구원하는데 (이것은 육체의 더러운 것을 제거하는 것이 아니요, 선한 양심이 하나님을 향하여 응답하는 것이니라.)」라고 번역했는데, 단어의 번역 순서를 왜곡하여 “침례에 의한 구원” 교리를 말하는 구절처럼 만들었다. 또한 사도행전 2:38인 『베드로가 그들에게 답변하기를 “회개하라. 그리고 죄들을 사함받은 것으로 인하여 너희 각자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침례를 받으라. 그리하면 너희가 성령의 선물을 받으리라.』(한글킹제임스성경)를 「이에 베드로가 그들에게 이르되, 회개하고 너희 각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침례를 받아 죄들의 사면을 얻으라. 그리하면 너희가 성령님을 선물로 받으리니」라고 번역했는데, 이것도 단어의 번역 순서를 왜곡하여 “침례에 의한 죄 사함” 교리를 말하는 “행위 구원”의 구절로 만들었다. 이렇게 단어의 번역 순서를 바꾸어 “침례에 의한 죄 사함과 구원”을 말하는 구절로 “변개”시킨 이유가 궁금하다. 정동수는 하나님께서 들어 쓰신 번역자가 아니다.
표준역은 “번역”과 “해석”과 “주석”의 차이를 모르는 사람의 번역이다. 그는 신명기 23:17에서 『이스라엘의 딸들 중에서는 창녀가 있지 못할 것이며 이스라엘의 아들들 중에서는 남색자가 있지 못할 것이니라.』(There shall be no whore of the daughters of Israel, nor a sodomite of the sons of Israel.)를 「이스라엘의 딸들 중에 어떤 매춘부도 없게 하고, 이스라엘의 아들들 중에 소돔족, 곧 성도착자가 한 명도 없게 할지니라.」라고 번역하였다. 일단 “어떤”과 “한 명도”를 넣어 어색한 번역을 한 것은 차치하고라도, 대문자 S가 아닌 소문자 s로 되어 이미 소돔이라는 지역의 의미가 사라졌기에 “남색자”로 번역했어야 할 단어를 “소돔족”으로 음역하고, 원문에 있지도 않은 “곧 성도착자”라는 “주석”을 자기 마음대로 번역 안에 집어넣은 것은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는다. 표준역은 주석서인가? 왜 “곧 성도착자”라는 “주석”을 본문 안에 넣었는가? 이렇게 자기 마음대로 단어들을 “첨가”해도 되는 것인가? 그래서 “기울임체”를 사용한 것이라고 말할지 모르지만, 기울임체를 쓰기만 하면 번역에 아무 말이나 넣어도 된단 말인가? 게다가 “남색자”를 “성도착자”라고 주석한 것이 말이 되는가? “남색”이라는 정확한 의미를 “성도착”이라는 포괄적 단어로 희미하게 만든 이유가 무엇인가? 미국의 배교한 근본주의자들처럼 “너무 노골적인 단어”는 “피해서” 주석한 것인가? 아니면 진정 우리말을 모르는 것인가?
표준역은 영어 단어에 집착하여 기계적인 해석을 함으로써 자연스럽고 우리말답게 번역해야 한다는 원칙을 이탈했기에 번역이라 부르기에는 너무 조악하다. 너무 어색한 단어들을 채택하여 우리말의 자연스러운 뉘앙스를 전혀 살리지 못한 것이다. 『의로운 자의 열매는 생명의 나무니, 혼들을 이겨오는 자는 현명하니라.』(잠 11:30)를 「의로운 자의 열매는 한 생명나무요, 혼들을 쟁취하는 자는 지혜로우니라.」로, 『그러나 그의 자리에서 그가 군대의 신을 공경하리니』(단 11:38)를 「그러나 그는 자신의 영지에서 전력들의 신을 공경하리라.」로, 『두려움과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온전히 이루라.』(빌 2:12)를 「두려움과 떨림으로 너희 소유의 구원을 나타내라.」로 번역함으로써 우리말을 읽고서도 무슨 뜻인지 한참을 생각해 보아야 한다. 한국 사람이 번역한 것이 맞는가?
표준역의 번역자는 번역을 할 때 한 단어에 한 의미를 선택해야 한다는 것도 모르면서 번역했다. 마태복음 26:28에서 『나의 새 언약의 피이기 때문이라.』(For this is my blood of the new testament,)를 「새 유언의 언약에 속한 나의 피이기 때문이라.」로 번역했다. testament에는 “유언”이라는 뜻과 “언약”이라는 뜻이 있지만 “유언의 언약”이라는 뜻은 없다. 이것은 마치 “연을 날려라.”(Fly a kite.)라고 번역해야 할 것을 kite에 “솔개”와 “연”이라는 뜻이 둘 다 있다는 이유로 “솔개의 연을 날려라.” 또는 “연의 솔개를 날려라.”로 번역한 것과 같다. 이런 엉터리 번역이 어디 있는가? 상식이 있는 사람이라면 이런 번역을 받아들일 수 있겠는가?
인터넷이나 유튜브 영상으로 유포되는 잘못된 논리들 중에서 그리스도인이 각별히 주의해야 할 것이 있다. “여러 성경을 비교하며 보아야 성경의 진의를 더 잘 알 수 있다”는 논리이다. 이런 논리를 펴는 자들은 성경이 “믿음과 실행의 최종권위”라는 개념이 아예 없고, 하나님께서 성경을 “보존”하신다는 사실을 전혀 믿지 않는다. 또한 하나님께서 보존된 원문에서 바른 번역본이 나오게 하실 능력이 없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말씀을 결코 잃지 않으신다. 『오 주여, 주께서 이 말씀들을 간수하시리니 주께서 이 세대로부터 영원토록 그것들을 보존하시리이다』(시 12:7).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말씀을 자신의 이름보다 높이셨다. 『내가 주의 거룩한 전을 향하여 경배하고 주의 자애하심과 주의 진리를 인하여 주의 이름을 찬양하리니 이는 주께서 주의 말씀을 주의 모든 이름 위에 크게 하셨음이니이다』(시 138:2). 따라서 이 성경 저 성경 펼쳐 놓고 자기 판단대로 자기 취향에 맞는 구절을 찾아 헤매는 자들은 하나님보다 자신을 더 높이는 자이며, 그러한 마음은 사탄에게서 나온 것임을 알아야 한다(사 14:12-14). 우리는 지금 “성경”을 지키려는 “성경대로 믿는 사람들”과 “성경”에 도전하는 “사탄의 하수인들” 사이에 벌어지는 “성경 전쟁” 한가운데에 서 있다. 그리스도인이라면 성경에 대한 바른 판단을 갖고 “하나님의 진영”에 서서 바른 성경을 지키는 “그리스도의 군사”의 역할을 다해야 한다. B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