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진리의 말씀을 올바로 나누어 자신이 하나님 앞에 부끄럽지 않은 일꾼으로 인정받도록 공부하라(딤후 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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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자훈련에 목매인 “온전론” 타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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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대로믿는사람들 <2024년 03월호>

한승용 / 킹제임스성경신학교 교수


한 때 사랑의교회는 담임목사 오정현의 논문표절 사건이 발단이 되어 사랑의교회갱신위원회(갱신위) 교인들과 오 목사 지지 교인들로 나뉜 적이 있었다. 지난 2014년 12월의 일인데, 그달 6일 저녁 8시경에 그 교회의 새 예배당 마당에서 기도회를 하려던 갱신위 교인들이 오 목사를 지지하는 교인들에 의해 가로막히는 일이 벌어졌다. 이로 인해 갱신위는 서초역 3번 출구 앞에서 교인 1,000여 명이 대치하는 난장판 속에서 기도회를 진행할 수밖에 없었다. 갱신위가 길가에서 찬양을 부르며 기도회를 시작하면, 오 목사 지지 교인들도 새 교회 마당에서 다른 찬양을 불러, 양측이 각각 설치한 스피커로 두 개의 찬양과 기도 소리가 서로 싸우는 것처럼 울려 퍼졌다. 새 교회 마당에서 찬양과 기도가 끝나자 오 목사 지지 측이 스피커로 클래식 음악을 크게 틀어 길가에서 기도하는 갱신위를 방해했다. 교인들 간의 거친 말다툼, 누군가가 가운데 손가락을 치켜든 쌍욕 행위, 그 와중에 경찰차 두 대와 경찰 버스 세 대가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대기해야 했던 그 “험악하고도 살벌한” 기도회와 찬양이 “사랑의교회”가 세상을 향해 보여 주었던 “사랑의 신앙”이었다. 교인 폭행 사건까지 일어나 상대를 고소하겠다며 난리가 아니었는데, 당시 필자는 그 교회의 트레이드마크인 “제자훈련”의 결과가 과연 이런 것이었나 하며 개탄스러워했다.


세월이 흘러 모든 사건과 기억이 망각의 무덤에 묻히면 결국 사람만 남게 되는 법이다. 현재 오 목사는 여전히 건재하며 지금은 <온전론>(국제제자훈련원)이라는 책을 출간하여 “제자훈련의 절대성”을 선전하고 있다. 오 목사에 대한 필자의 기억은 그의 비성경적인 말들에 대한 비평의 글들을 썼던바 부정적인 것 일색이기에 <온전론>이라는 책을 향한 나의 첫 시선은 고울 수가 없었다. 故 옥한흠 목사에 의해 시작된 제자훈련은 옥 목사가 살아 있는 동안 그 누구도 온전한 사람으로 성장시키지 못했는데, 후임인 오 목사와 그의 <온전론> 역시 마찬가지로 보인다. 이것은 결코 편견에서 비롯된 생각이 아니며, 책을 펼쳐 보면 제자훈련에 관한 부정적인 시각이 옳았음을 깨닫게 된다.



-제자훈련과 “은혜의 주류,” 그리고 존 칼빈


「“제자훈련이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해서 시대와 문화, 환경과 처지에 따라 수많은 대답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지난 40년이 넘는 목회에서 한 가지 양보할 수 없는 결론이 있다. “제자훈련은 성도들을 은혜의 주류에 서게 하는 훈련이다.” 은혜의 주류라는 말은 은혜받는 자리, 은혜받는 환경, 은혜받는 사람과 함께하는 것을 말한다. 그런데 은혜는 반드시 성경에 기초한 신앙의 정통성 위에 서 있어야 한다. 마틴 루터(Martin Luther)와 요한 칼빈(John Calvin)이 가졌던 말씀에 기초한 종교개혁적 교리... 예수님만을 신앙의 주인으로 삼는 그리스도의 주 되심(Lordship)을 붙잡는 것이 은혜의 주류에 서는 것이다」(p.36).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은 “은혜”라는 말을 참으로 좋아한다. 은혜로운 설교였다, 그 사람 말이 참 은혜롭다, 이번 일은 하나님의 은혜였다 등 “은혜”는 모든 긍정적인 일에 내걸 수 있는 깃발이다. “은혜”라는 말이 휘날릴 때 모든 부정적인 면들은 꼬리를 감추고 사라진다. “은혜”는 모든 악한 상황을 무마하는 치료제이다. 심지어 거짓 교리마저도 어물어물 덮어 버리고 정통으로 가장할 수 있게 한다. 오 목사가 제시한 “은혜의 주류”라는 말이 그렇다. “은혜받는 자리, 은혜받는 환경, 은혜받는 사람과 함께하는 것”을 누가 거부하겠는가? 『우리 모두가 그의 충만한 데서 받았으니 은혜 위에 은혜니라. 율법은 모세를 통하여 받았지만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온 것이라』(요 1:16,17). 신약 교회 시대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가져오신 은혜가 의를 통하여 군림하는 시대인데(롬 5:21), 안타깝게도 그 은혜가 죄와 무지로 인해 엉뚱한 곳에서 남용된다. 그 대표적인 경우가 오 목사가 언급한 “존 칼빈”의 교리이다.


존 칼빈의 은혜의 교리는 그의 5대 강령 중에 “저항할 수 없는 은혜”라고 불린다. “인간이 아담의 타락에 영향을 받아 의지가 무능력해짐으로써 예수 그리스도를 스스로 믿을 수 없기에 성령님께서 창세전에 구원으로 택하신 사람에게 오셔서 그를 강제로 거듭나게 하는 은혜를 베풀어 주셔야만 그 죄인의 의지가 살아나 복음을 믿을 수 있다.”라는 것이 “저항할 수 없는 은혜”의 교리가 지닌 요지이다. 역으로 보면, 창세전에 구원으로 택함받지 못하고 지옥으로 버림받은 사람들에게는 성령님에 의한 강제적인 거듭남의 은혜가 주어지지 않는다는 얘기인데, 하나님께서 창세전에 누구는 구원으로 예정하고 누구는 그가 태어나기도 전에 지옥으로 예정하셨다는 교리는 결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주어진 신약적 은혜의 교리가 아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고 진리의 지식에 이르기 원하시기 때문이며(딤전 2:4), 그분께서는 악인의 죽음을 결코 기뻐하지 않고 그가 죄에서 돌이키기를 기뻐하시기 때문이다(겔 33:11). 제자훈련이 “성도들”을 은혜의 주류에 서게 하는 훈련이라면, 그 “성도들”은 대체 어떤 “성도들”을 가리키는 것인가? 창세전에 구원으로 예정되었기에 성령님에 의해 강제로 거듭나서 복음을 믿게 된 “구원으로 예정된 사람들”을 가리키는 것인가? 그런 이단 교리가 제자훈련의 요체라면 필자는 그러한 은혜를 받을 의향도 없고, 그런 썩어빠진 은혜의 주류에 서고 싶지도 않다. 차라리 거리로 나가서 창세전에 지옥으로 버림당했다고 주장되는 불쌍한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여 예수 그리스도께로 이겨와 지옥의 형벌을 면하게 해 주고 싶다.


사실 이 세상에 태어나는 “모든 사람”은 “영이 죽은 채로 태어나는 죄인들”(엡 2:1)이기에 하나님을 알지 못한 채로 죄를 짓고 살다가 지옥에 던져질 운명에 처해 있다. 그와 같은 면에서 세상 모든 사람들이 “지옥으로 정해져” 있는 것이다. 그런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여 하나님의 은혜로(엡 2:8,9, 롬 3:24) 그분의 자녀가 되게 해 주는 것이 성경적인 은혜의 교리이다. 성경대로 믿는 구령자들이 거리로 나가서 만나는 죄인들 중에는 창세전에 구원으로 예정된 사람도 없고 지옥으로 버림받은 사람도 없다. 그들은 모두 다 죄 중에서 잉태된 죄인들일 뿐이며, 그들 모두에게 필요한 것은 동일하게 십자가의 복음이다. 존 칼빈의 저항할 수 없는 은혜는 그 누구에게도 필요치 않다.

-“제 발에 걸려 넘어진” 신학적 궤변


「복음서와 사도행전에는 ‘제자’(μαθητής)라는 말이 무려 263회나 등장한다. 지상명령(또는 대위임령)으로 알려진 마태복음 28:19에서 예수님께서 사용하신 “제자로 삼아”라는 동사는 헬라어로 ‘마쎄튜오’(μαθητεύω)인데, 이는 ‘배우다’라는 동사에서 파생된 말이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제자’라는 말이 사도들의 서신서에는 등장하지 않는다. 그 대신 “믿는 자”(행 4:4), “형제”와 “자매,” “성도,” “신자” 그리고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이 쓰였다. 하지만 ‘제자’라는 말이 나오지 않는다고 해서 제자도 또는 제자훈련이 사라진 것은 아니다. 제자라는 말 대신 ‘따르는 자,’ 무엇보다도 ‘완전한/온전한 자’라는 말로 대체되었다」(p.41).


인간은 말을 아껴야 한다. 말이 많으면 죄를 짓기 때문에 침묵이 금일 때가 있다. 침묵은 무지를 감춰 주기도 하지만, 한국 교회 목사들은 침묵보다는 발언을 택하고, 뭐나 되는 듯이 아는 척을 하다가 낭패를 당하기도 한다. 변개된 개역성경의 “제자로 삼아”라는 번역은 해당 헬라어인 “마쎄튜오”(μαθητεύω)를 오역한 것이다. 원래 그 단어는 섭리로 보존된 <한글킹제임스성경>처럼 『가르치고』(마 28:19)라고 번역했어야 했다. 『그후에 예수께서 그들에게 오셔서 일러 말씀하시기를 “하늘과 땅에 있는 모든 권세를 나에게 주셨도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들을 가르치고,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침례를 주며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보라, 내가 세상 끝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고 하시더라. 아멘』(마 28:18-20). 오 목사는 “그런데 이상하게도 ‘제자’라는 말이 사도들의 서신서에는 등장하지 않는다.”라며 의아해했는데, 사도들의 서신서에 “제자”라는 말이 언급되지 않은 이유는 주님께서 그들에게 “모든 민족들을 제자로 삼으라”고 명령하지 않으셨기 때문이다. 사도들은 주님의 명령대로 모든 민족들을 “가르치는” 사명을 수행했기에 사도 바울 역시나 『이런 것들을 명령하고 가르치라.』(딤전 4:11), 『이러한 것들을 가르치고 권면하라.』(딤전 6:2)라고 기록했다.

“제자”라는 말이 언급되지 않는 것은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제자”라는 말이 “이상하게도” 사도들의 서신서에 등장하지 않는다고 함으로써 제 발에 걸려 넘어진 오 목사는 그 즉시 궤변을 만들어 냈다. 즉 그 말이 사도들의 서신서에서 “믿는 자,” “형제,” “자매,” “성도,” “신자,” “그리스도인,” “따르는 자,” “완전한/온전한 자” 같은 말로 대체되었다고 해 버린 것이다. 누구보고 믿으라고 그런 말을 하고 있는가? 그것은 성경에도 없는 제자훈련을 정당화하기 위해 지어낸 궤변에 불과하다. 일고의 가치도 없고 재고는 꿈도 꿀 수 없는 억설이다. 성경으로 진리를 가르치지는 않고 거짓을 참인 것처럼 꾸며대는 억지 논법은 결코 목사가 사용해야 할 수단이 아니다. 사도들의 서신서에 “제자”라는 말이 없는 것은 그들이 누군가를 자기 제자로 삼았던 일이 없기 때문이다! 교회에서 사람이 사람을 제자로 삼는 것은 성경에서 명령한 바가 아니며, 다만 자기가 배운 진리를 다른 사람들에게 가르쳐서 그 말씀을 지속적으로 전파하는 일만을 명령하고 있다. 『그리고 네가 많은 증인들 가운데서 내게 들은 것들을 신실한 사람들에게 맡기라. 그들이 또 다른 사람들을 가르칠 수 있으리라』(딤후 2:2). 이것은 오 목사가 「제자훈련 목회를 가능케 한 그 한 구절」(p.206)이라고 제시한 구절인데, 그가 아전인수격으로 받아들인 이 명령은 우리 주님의 지상명령인 “가르치라”(마 28:19)와 정확히 일치함을 알아야 한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들을 가르치고』, 『그들이 또 다른 사람들을 가르칠 수 있으리라.』


위의 명령들은 하나님의 영감으로 주어진 명령들이기에(딤후 3:16), 감히 “제자훈련 목회”라는 것에 갖다 댈 말씀이 아니다. 디모데후서 2:2에는 제자훈련의 “제” 자도 들어 있지 않은 것이다! 하나님의 영감으로 주어진 성경이 위험한 책인 이유는, 영감으로 주어진 성경의 권위가 오용되어 비진리를 입증하는 데도 사용될 수 있기 때문이다. 영감으로 주어지지 않은 변개된 성경들마저도 “성경”이라는 이름하에 그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현실이다. 변개된 개역성경의 “제자를 삼으라”는 잘못된 명령을 보라. 주님께서는 그렇게 말씀하신 적이 없는데 그 잘못된 표현이 영향을 주어 “제자훈련”이라는 신앙적 거대 변종을 낳지 않았던가!


변개된 개역성경의 “제자를 삼으라”는 명령에 순종해서는 온전케 될 수 없다. 하나님의 영감으로 주어진 <한글킹제임스성경>의 “가르치라”는 명령에 순종할 때 하나님의 사람이 “온전하게” 된다(딤후 3:16,17).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그리스도인을 “제자”로 부르신 분은 “예수님”이시라는 사실이다. 『또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지 않고 나를 따라오는 자는 나의 제자가 될 수 없느니라』(눅 14:27). 그리스도인은 사람의 제자가 되어서는 안 되며 주님의 제자가 되려고 경주해야 한다. 교회의 성도들을 주님의 제자가 되게 하려고 그들에게 성경을 “가르치는” 일은 지극히 성경적이다. 교회는 성도들에게 성경을 “가르쳐서” 그들로 하여금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는 “주님의 제자”가 될 수 있게 해야 한다. 그리스도인이 다른 그리스도인을 제자로 삼아야 한다는 주장은, 위의 누가복음 말씀을 주신 예수님을 모독하는 것임을 알라. 자기 발에 걸려 넘어진 궤변으로 누구의 믿음을 서게 할 수 있단 말인가?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면 둘 다 구덩이에 빠지는 법이다(마 15:14). <온전론>에 대해 할 말이 더 있지만 여기서 끝마치려고 한다. 500페이지가 넘는 분량을 고작 7페이지의 글로 다룬다는 것은 몹시도 어려운 일이다. 목사가 자기 책을 내면 그것은 남보다 더 공부하고 수고한 결과이지만, <온전론>이라는 졸작으로는 <한글킹제임스성경>을 당해 낼 수 없다. 공부도 공부 나름이다. 변개된 구절로 시작된 제자훈련으로 하나님을 이기려고 해서는 안 된다. 거짓에 맞서는 하나님의 말씀은 결코 물러서지 않는다. 깨닫고 돌이키든, 완고하게 자기 길을 가든, 그것은 이 글을 읽는 독자의 몫이다. 무지에는 약이 없다. 다만 내버려 둘 뿐이다(고전 14:38). 유명세만 보고서 아무 교회에나 발을 들여놓으면 그 대가는 본인이 치러야 한다. 구원받지 않았다면 지옥에 갈 것이고, 구원받았다면 『그리스도의 심판석』(고후 5:10)에서 상이 없게 된다. B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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