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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용서해야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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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대로믿는사람들 <2019년 11월호>
"상대방이 지은 죄나 잘못한 일에 대해 꾸짖거나 벌하지 않고 덮어 주는 것"이 용서의 사전적 정의이다. 한편 성경은 용서와 관련하여 『자비를 수천 대까지 간직하며 죄악과 허물과 죄를 용서하나 범법자가 결코 깨끗게 되지는 아니하리니 그 조상들의 죄악을 그 자손들과 그 자손들의 자손들 삼사 대까지 미치게 하느니라.』(출 34:7)라고 말씀하는데, 이처럼 죄들을 "제거하는" 것이 아닌, 단순히 "덮어 준다"는 의미에서의 용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기 이전인 구약 시대의 용서의 방법이었다.구약 시대에는 죄인들을 대신해서 동물들을 죽여 피 흘리게 함으로써 죄들을 용서받을 수 있었다. 하지만 이런 것들로는 결코 죄들을 제거할 수 없었다. 『이는 황소들과 염소들의 피로는 죄들을 제거하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라』(히 10:4). 반면에 신약 시대에는 『세상 죄를 제거하는 하나님의 어린양』(요 1:29)의 피로 인류의 모든 죄들이 단번에 완전히 제거되었다. 그 결과 하나님께서는 구원받은 성도들의 『죄들과 불법들을 다시는 기억하지』(히 10:17) 않으신다.
오래전 모라비안들이 에스키모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러 갔을 때, 처음에는 그들과 언어 소통이 되지 않아 무척 애를 먹었는데, 특히 그들의 언어에 "용서"라는 단어가 없어서 더욱 힘들었던 것이다. 결국 그곳 원주민들과의 오랜 소통 끝에 몇 개의 단어들을 조합해서 용서의 의미를 전달할 수 있었는데, 그들에게는 용서란 단어가 "다시는 그것을 생각하지 않는다."라는 의미였다고 한다. 에스키모인들은 비록 용서라는 단어는 없었지만, 용서의 의미만큼은 제대로 알고 있었던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죄들이 제거된 그리스도인들은 그와 같은 "용서의 의미"로 상대방을 용서할 수 있어야 한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상당수의 그리스도인들이 제대로 된 용서를 못하고 있다. 만일 그들이 용서의 진정한 의미를 알고 용서를 해야 하는 성경적인 이유를 올바르게 안다면, 그 누구라도 기꺼이 용서할 수 있을 것이다.
우선 거듭난 그리스도인은 이 땅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대신하는 삶을 살아야 하기 때문에 용서해야 한다. 즉 "그리스도를 대신한 대사"로서 죄인들이 하나님과 화해하고 용서받을 수 있도록 그들에게 복음을 전파해야 하고(고후 5:18-20), 예수님께서 그리하셨던 것처럼 자신에게 죄를 지은 자들도 기꺼이 용서해야 하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이에 관한 교훈을 주시기 위해 "일만 달란트 빚을 탕감받은 종의 비유"(마 18:23-35)를 말씀하셨는데, 이 비유에 따르면 그 문제의 종은 그에게 일백 데나리온을 빚진 동료 종을 감옥에 집어넣었다가 화가 난 주인으로부터 큰 책망과 징계를 당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으로부터 "모든 죄"(일만 달란트)를 용서받은 그리스도인은 자신에게 "잘못한 사람들의 죄"(일백 데나리온)를 마땅히 용서해 주어야 하는 것이다.
또한 예수님께서는 이 비유에 앞서서 "내 형제가 내게 죄를 지으면 몇 번이나 그를 용서해 주어야 합니까?"라는 베드로의 질문에 『일흔 번씩 일곱 번까지라고』(마 18:22) 대답하심으로써 "완전히, 전적으로" 용서해야 할 것을 강조하셨다. 사실 우리의 형제자매들을 이렇게 용서하는 것이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용서하는 것의 진정한 의미이다. 『너희가 누구에게 무엇을 용서하면 나도 그리하고 만일 내가 무엇을 용서했다면 그것은 너희를 위하여 내가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용서한 것이라』(고후 2:10).
심지어 십자가에 달리셨던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죄인들의 모순된 행동들"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용서하셨다(눅 23:34). 이러한 사실을 믿고 구원받은 성도는 이제 그 안에 내주하시는 예수님의 생명을 대신해서 살아가고 있다(고후 4:10,11). 우리가 이 땅에서 용서의 삶을 사신 주님을 대신하여 살고 있다는 것을 안다면, 우리가 용서하지 못할 사람은 없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용서하신 것같이 용서하면 되는 것이다. 『만일 어떤 사람이 누구에게 불평이 있으면 서로 용납하고, 서로 용서하기를 마치 그리스도께서 너희를 용서하신 것같이 너희도 그리하라』(골 3:13).
이러한 사실에도 불구하고 형제자매들을 용서하지 못하는 성도는 지금 그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있지 않다는 것을 드러내는 것이 된다. 하나님을 향한 사랑은 교회를 사랑하는 것으로 나타나야 하는데, 이는 교회를 대하는 태도가 예수 그리스도를 대하는 태도이기 때문이다. 바울은 구원받기 전에 교회를 박해했는데, 그것은 곧 예수 그리스도를 박해하는 일이었다. 『네가 왜 나를 박해하느냐?』(행 9:4)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몸인 유기체이고(엡 1:23) 성도들은 주님의 몸을 이루고 있는 지체들이다(고전 12:18). 따라서 예수님을 사랑하는 성도는 다른 지체들을 사랑할 수 있고, 사랑할 수 있으면 당연히 용서도 할 수 있다. 『무엇보다 서로 뜨겁게 사랑하라. 이는 사랑이 허다한 죄들을 덮기 때문이니라』(벧전 4:8). 말하자면 용서는 사랑을 확인할 수 있는 한 방법인 것이다. 『그러므로 너희는 오히려 그 반대로 그런 사람을 용서하고 위로하여야 하리니 그래야 아마 그가 더 심한 슬픔에 빠지지 아니하게 되리라. 이 때문에 내가 너희에게 권고하노니 너희는 그를 향한 너희의 사랑을 확인하라』(고후 2:7,8). 반대로 용서하지 않으면 『내가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이는 너희가 서로 사랑하라는 것이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요 13:34)라는 말씀을 어기는 것이 된다.
주님을 사랑하는가? 그렇다면 당신의 죄를 용서하시려고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기까지 사랑을 나타내 주신 주님을 기억하면서 "그리스도를 위해" 다른 지체들을 용서해야 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주님을 향한 사랑을 입증해야 하는 것이다. 『너희는 서로 친절하고 다정다감하며 서로 용서하되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위하여 너희를 용서하신 것같이 하라』(엡 4:32).
용서하지 않으면 "사탄의 계략"에 속아 모든 유익을 강탈당하게 된다. 사도 바울은 용서에 관해(고후 2:10) 권면하고 나서 이렇게 말했다. 『사탄이 우리에게서 유익을 취하지 못하게 하려는 것이니 이는 우리가 그의 계략을 모르지 않음이라』(고후 2:11). 사탄은 성도들 사이에서 유익을 취하여 종국에는 교회를 무너뜨리려고 끊임없이 계략을 펼치는데, 그 일환으로 성도들 서로 간에 용서하지 못하게 만드는 것이다. 그 계략을 저지하기 위해서라도 그리스도인은 용서해야 한다. 말하자면 용서하지 않는 성도는 "사탄의 편"에 서 있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편에 서 있는가, 그렇지 않은가의 여부는 영적 전쟁에서 승패를 좌우하는 중대한 문제이다.
유다 이스카리옷과 베드로를 비교해 보라. 그들은 둘 다 죄를 지었다. 예수님을 배반한 유다는 주님을 팔아넘겼으며, 베드로는 주님을 부인하고 저주했다. 후에 그들은 둘 다 후회하며 슬퍼했다. 하지만 두 사람의 결말은 완전히 달랐는데 그 차이는 무엇이었는가? 베드로는 그의 죄를 깨닫고 "주님께로 돌이켜서 용서를 받아" 다시 주님의 편에 섰다. 반면에 유다 이스카리옷은 죄를 깨닫고 후회하기는 했어도 "주님께로 돌아오지 않았기에 용서도 받지 못했고" 주님의 편에 서지도 못했다. 결국 베드로는 "죄들의 용서"를 선포하는 일꾼이 되었지만(행 10:43), 유다는 그의 죄를 제대로 처리하지 못한 채 스스로 목매어 죽고 말았다. 이는 그가 "사탄의 계략과 정죄"에 걸려든 결과였다.
성도라면 누구나 그리스도의 편에 서서 승리하기를 원할 것이다. 그렇게 하려면 자기 합리화나 자기 의, 교만 등과 같은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서 그리스도께 복종』(고후 10:5)시켜야만 한다. 주님께서 "용서하라!"라고 명령하셨으니, 용서하지 못하는 우리의 "육신"을 죽은 것으로 여기고 그 말씀에 온전히 복종해야 하는 것이다. 그렇게 할 때 우리 안에 사시는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대신하여 일하시게 되고, 비로소 우리는 용서할 수 있게 된다.
용서하지 못하면 마음에 화평이 없고 괴로운 시간만 보내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사탄이 노리는 것이다. 누가 되었든지 상대방을 용서하고 주님께 맡기면 그 마음에 하나님의 평강이 임하게 된다. 심지어 주님께서는 상대방을 변화시키셔서 그 사람과의 관계까지도 회복시켜 주신다. 『사람의 행위가 주를 기쁘시게 하면 주께서 그 사람의 원수들까지도 그와 화목하게 하시느니라』(잠 16:7).
하나님께서 용서하신 성도를 함부로 판단하거나 업신여기고 적대시하는 성도는 사탄의 편에 서 있는 것이 된다. 과연 그런 상태에서 드리는 경배를 주님께서 기뻐하시겠는가? 『그러므로 만일 네가 예물을 제단에 드리다가 거기서 네 형제가 네게 반감을 갖고 있다는 것이 생각나거든 네 예물을 거기 제단 앞에 놓아두고 가서 먼저 네 형제와 화해하고 그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마 5:23,24).
언젠가 앞에서는 그를 무척 아껴 주고 사랑하는 체하지만 뒤에서는 별별 꼬투리를 다 잡아서 험담하는 한 사람 때문에 어려움을 겪은 성도가 있었다. 그 성도는 그 사람이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그 진심을 알게 되었을 때, 그를 볼 때마다 매우 부자연스러웠고 의심의 눈초리로 대하게 되는 등 오랫동안 괴로운 시간을 보낼 수밖에 없었다. 결국 그 사람을 미워하면서 죄를 짓고 있는 자기 자신이 너무나 한심스러웠고 교회를 가는 발걸음조차 무거웠다. 더 이상 이렇게 해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에 그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주님께 이렇게 기도했다고 한다. "주님, 주님께서 저 같은 죄인도 용서하셨으니, 저도 그를 용서할 수 있도록 해 주십시오. 주님의 마음과 사랑으로 그 성도를 대하게 해 주십시오." 그러자 마음에는 잔잔한 평안이 찾아들었고, 그 후로는 그런 위선을 부리는 성도가 오히려 더 불쌍히 여겨져서 진심어린 연민으로 그를 대할 수 있게 되었다. 결과적으로는 그 "위선자"가 교회를 떠나고 말았지만, 이를 통해 하나님께서는 그 성도에게 진심으로 지체들을 용서하고 사랑하며 섬기는 방법을 배우게 하셨던 것이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의 피를 통해 당신을 용서하셨을 때 그 모든 죄들을 더 이상 기억조차 않으시는 것처럼, 당신 역시 그러한 마음과 자세로 지체들을 용서해야 한다. 그렇게 할 때 당신은 그 안에 살아 계신 예수님을 증거할 수 있고, 주님을 온전히 사랑할 수 있으며, 주님의 편에 서서 승리하는 삶을 살 수 있게 된다. 그렇게 하는 것이 당신이 속한 교회를 세우는 일이다! B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