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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배의 규례를 어긴 자들에 대한 형벌 (레위기 10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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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대로믿는사람들 <2007년 07월호>
레위기 10장은 구조적으로 특별하다. 레위기는 출애굽기나 민수기와 달리 시내 산에서 받은 율법을 백성들에게 전달하는 책이다. 출애굽기나 민수기는 출애굽, 혹은 광야 생활이라는 사건들을 역사적으로 기술하는 가운데 율법의 내용들이 다루어지고 있지만, 레위기는 율법 자체만을 다루고 있다. 물론 역사적 기반이 없는 것은 아니다. 시내 산에서 십계명을 받고 성막을 짓고는 본격적으로 제물을 드리는 과정이 레위기의 역사적 배경이다. 그렇지만 그 내용들은 다분히 사건 설명적이라기보다는 율법의 각 조항들을 자세히 설명하는 법전(法典) 형식으로 되어 있다.하지만 레위기 10장은 그러한 법전 가운데 한 사건을 제시한다. 바로 아론의 아들들인 나답과 아비후가 “다른 불”을 드리다가 죽임을 당하는 사건이다. 하나님께서는 이 사건을 토대로 하나님의 법도의 중요함을 다시 한 번 각인시켜 주시면서, 제사장들의 성별에 대해 추가적인 규례들을 주신다.
이처럼 율법이 어떤 사건을 기반으로 해서 주어진다는 설명은 매우 중요하다. 왜냐하면 이스라엘이 지키는 그 율법은 하나님께서 어떠한 구체적인 역사적 상황 속에서 주신 매우 정확한 말씀이기 때문이다.
오늘날 많은 학자들은 율법이 후대에 형성된 것이라 생각한다. 그들은 모세오경(“토라”)은 모세가 쓴 것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창세기도 여러 사람들에게 구전되던 것을 여러 저자들이 부분적으로 기록했고, 그것이 후대에 편집된 것이라 한다. 오경의 다른 네 책들도 마찬가지인데, 특히 레위기는 바빌론 포로기 때(B.C. 6세기) 유대인들의 민족적 종교심을 고취시키기 위해서 일단의 레위인들이 제사법을 구체화시킨 것이라 말한다(소위 “P”문서).
하지만 레위기 10장처럼 분명한 역사적 상황이 등장하는 것을 보면, 레위기는 분명 하나님께서 그러한 상황 속에서 모세에게 구체적으로 계시해 주신 직접적인 율법이다(사실 8,9장도 아론의 첫 직무라는 구체적인 역사적 상황 가운데서 주신 것이다). 모든 율법에는 확실한 역사적 근거가 있으며, 그것은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 그분의 영감으로 율법서들을 기록하셨다는 증거이다.
1. 나답과 아비후의 “다른 불”
레위기 10장은 다음과 같은 말씀으로 시작한다.
『아론의 아들들인 나답과 아비후가 각자 자기의 향로를 가져다가 그 안에 불을 담고, 그 위에 향을 담아 주께서 그들에게 명령하지 않으신 다른 불을 주 앞에 드렸더니, 주께로부터 불이 나와서 그들을 삼키니 그들이 주 앞에서 죽은지라』(레 10:1,2).
이것은 경배의 법이 주어진 이래, 그 법을 어겨 죽임을 당한 첫 사례이다. 레위기 6:12에서는 하나님께서 제단에 내리신 불을 꺼지지 않게 하라는 명령이 주어졌다. 제사장은 매일 아침 제단에 나무를 놓아 불이 꺼지지 않게 해야 한다. 나답과 아비후는 아론의 아들들로서 제사장의 임무를 맡은 자들이다. 하지만 여기서 이들의 잘못은 그 제단의 불을 꺼뜨렸다는 것이 아니라, 향로에다 향을 피울 때 “다른 불”을 놓았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백성들이 경배함에 있어서 철저히 “규정”대로 하기를 원하셨다. 그 규정이란 다름아닌 하나님의 말씀이다. 하나님의 말씀에 위배된 방법으로 드리는 경배는 원치 않으신다. 하나님께서 이에 대해 얼마나 철저하셨는지는, 출애굽기 30:34-38에도 제시된다. 제사장이 드리는 향에 대해 말씀하시는 장면인데, “약제사의 기술에 따라”(출 30:35) 향을 제조하라고 말씀하셨고, 만일 누구라도 그것과 같은 것을 만든다면 그는 반드시 “그의 백성에게서 끊어지리라.”고 말씀하셨다(출 30:38). 즉 주께서 “지시하신” 대로만 해야 하는 것이다. 하지만 나답과 아비후는 주께서 지시하지 않으신, 전혀 이상한 방법으로 향로에 불을 붙인 것이다.
원래 향에 피울 불은 번제단의 불에서 가져와야 한다. 이것은 레위기 16:12,13에서 제시된다. 하나님께서는 레위기 16장에서 향로에 향을 피우는 규례를 분명히 제정해 주셨다. 그렇다고 아직은 레위기 10장이므로 향피우는 규례를 몰랐다고 변명할 수 없다. 왜냐하면 성막이 지어지고 레위기 16장에 이르기까지 그 수많은 날들 동안 제단불로 향피우지 않았을 리는 만무하기 때문이다. “다른 불”이라는 말자체가 그들이 알면서도 잘못 행했다는 것을 보여 준다. 혹 그들이 제단불을 붙이는 것을 몰랐다할지라도, 그렇다면 오히려 이들은 기다려야 했었다. 이들의 문제는 하나님의 뜻을 거스렸을 뿐만아니라 하나님께서 지시하지 않으신 것을 육신적인 열심으로 앞서 나간 것이었다.
하나님을 섬기는 데에 있어서 육신적인 열정은 반드시 죄를 유발하게 되어 있다. 하나님의 일을 함에 있어서 하나님의 뜻을 구하지 않고 행한 것은 항상 실패한다. 이것은 성경에 수많은 예들로 제시되어 있다. 여호수아는 기브온 거민을 맞아들임에 있어서 그런 실수를 저질렀다. 그래서 구약의 유대인들은 전쟁에 임할 때 항상 하나님께 물은 후 나아갔다. 그렇게 하지 않은 전쟁은 항상 실패했다(민 14:40-45).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뜻은 성경에 제시되어 있다. 성경에 제시된 대로 행하면 하나님을 섬기는 데에 아무런 지장이 없다. 성경은 경배의 규례이기 때문이다. 구약에서는 율법이 경배의 규례였다. 규례대로 행하지 않은 경배는 죄가 된다. 육신적인 열성은 반드시 하나님의 뜻에 빗나가기 마련이고, 그것은 죄가 된다.
어쨌든 이러한 사건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제사장들의 성별에 관해서 더 구체적인 내용들을 말씀해 주신다. 바로 시신 처리 문제인데, 나답과 아비후의 시신을 처리함에 있어서 모세는 철저히 성별의 법도에 따라 지시했다. 제사장들은 완전히 성별된 사람들이다. 그래서 아론의 아들들(제사장들)은 자기 형제의 시신을 치우지 못한다. 대신 그들의 친척들이 그들의 시신을 치워야 했다(4절).
또한 그들은 자기 가족의 죽음을 애도해서도 안 되었다(6절). 그들은 저주받아 죽은 것인데, 그들을 애도한다면 하나님의 저주에 불만을 품은 것이 되기 때문이다. 제사장은 기본적으로 자기 가족의 시신을 처리해서도 안 되었다(레 21:11). 특히 범죄한 가족의 죽음을 애도해서는 안 되며, 그들의 죽음 때문에 직무를 소홀히 해서도 안 되었다(10:6; 21:10). 모세는 아론과 또 남은 제사장들에게 명하여 성막 안에서 직무를 행하라고 명한다(10:12-20). 하지만 백성들은 이 일을 슬퍼해야 했다. 그것은 백성들이 이들 죄인들의 죽음을 애도한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진노로 인한 두려움을 알게 하려는 것이다.
제사장들이 가족의 장례에까지 관여하지 못한다는 것은 인간적으로 볼 때 잔인해 보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것은 제사장에 대한 완전한 성별을 요구하시는 것이다. 이들은 더 이상 인간 가족과 연관된 자들이 아니라 전적으로 하나님께 구별된 자들이기 때문이다.
이와 비슷한 말씀을 신약에서 예수님께서도 하셨다. 『그의 제자들 가운데 한 사람이 주께 말씀드리기를 “주여, 나로 먼저 가서 내 아버지를 장사지내게 하옵소서.”라고 하니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시기를 “나를 따르라. 그리고 죽은 자들로 그들의 죽은 자를 장사지내게 하라.”고 하시니라』(마 8:21,22). 예수님께서는 여기서 이 제자에게 거의 제사장 수준의 성별을 요구하시는 것이다. 물론 이것은 육신적으로는 할 수 없는 일이며, 구약적인 상황에서도 불가능한 것이다. 이것은 신약적인 교리를 암시한다. 즉 우리는 모두 제사장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얼마나 성별의 본을 보여야 하는지는 명확하다.
2. 거룩한 것과 속된 것의 구별
이와 더불어 하나님께서는 제사장들의 성별의 규례에 추가 사항을 제시해 주셨다. 그것은 직무를 행할 때 술을 마시지 말라는 것이었다. 『너나, 너와 함께한 너의 아들들은 회중의 성막으로 들어갈 때에 포도주나 독주를 마시지 말라. 그래야 죽지 않으리라. 그것이 너희 대대에 걸쳐 영원한 규례가 되리라』(9절). 이것은 너무도 당연한 것이었지만, 규례로 못박아 놓지 않으면 이들이 얼마든지 범할 수 있기 때문에 제시해 주시는 것이다.
술마시는 것은 기본적으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일이 아니지만, 구약에서는 어느 정도 허용되었다. 예를 들어 신명기 14:26에서는 제한적으로 술이 허용되는 예를 보여 준다. 하지만 잠언 23:31에서는 술을 쳐다보지도 말라 하셨다. 이는 술이 얼마나 악하게 작용하는지를 보여 주며, 술에 대한 하나님의 기본적인 뜻이 무엇인지를 제시해 주는 것이다. 특히 하나님의 일을 하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일을 하는 동안에는 더욱 철저해야 했다. 이는 나실인에게도 마찬가지다. [이 두 말씀 가운데서 고민할 필요가 없다. 술을 마시지 않으면 되는 것이다. 술에 대해 부정적으로 말씀하는 구절이 얼마나 많은데, 이 구절 하나만 붙잡고 술을 먹으려 하는가? 에베소서 5:18에는 『술 취하지 말라. 그것은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으로 충만하라.』고 말씀하는데, 이는 술과 성령이 얼마나 극명하게 대립되는지를 잘 보여 준다. 술을 입에 대는 즉시 성령충만이 사라짐을 알아야 한다.]
이와 연관해서 하나님께서는 율법의 기본 정신, 아니 성경 전체의 기본 정신이 되는 매우 중요한 말씀을 해주신다. 그것은 『그래야 너희가 거룩한 것과 거룩하지 않은 것, 불결한 것과 깨끗한 것 간의 차이를 구별하며』(레 10:10)라는 말씀이다. 하나님께서는 거룩한 것과 속된 것을 구별해 주신다(10절). 누구라도 세상에 연루된 상태에서는 하나님을 섬길 수 없기 때문이다.
경배는 거룩한 것이다. 반면 일반적인 생활은 속된 것이다. 그렇다고 일반적인 생활이 악하다는 것은 아니다. 백성들은 일반적인 삶에 있어서도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옳게 행해야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일반적인 생활 자체가 거룩한 것은 아니다. 거룩한 것은 경배, 성막, 제사장 등 하나님과 직접 관련된 것들이다. 그러므로 속된 것이라고 무조건 죄라는 것은 아니나, 적어도 그것이 거룩하지 않다는 것은 분명하다.
구약에는 정결에 관해 세 개의 구분이 있음을 알아야 한다. 예를 들어 말하면, 이방인이 있고 유대인이 있다. 유대인은 이방인에 비해 구별되어야 한다. 이것 자체가 백성 전체의 성별을 말한다. 하지만 유대인 내에서도 일반 백성과 레위인들(혹은 제사장들)의 구별이 존재한다. 이에 대해서는 더 완벽한 성결이 요구된다. 백성들의 삶에 있어서도, 죄가 있고 온전한 생활이 있고 경배의 행위가 있다.
여기에서 우리는 하나의 교훈을 발견한다. 오늘날 성도들은 그 자신이 하나님의 성전이므로 죄를 짓지 않고 올바른 삶을 살아야 한다. 가정, 직장, 학교 등에서 온전하고 모범적인 삶을 살아야 한다. 즉 세상 사람들과 다른 “성별”의 삶을 살아야 한다. 하지만 그것이 곧 직접적인 하나님의 일은 아닌 것이다. 아무리 모범적인 삶을 살지라도 직접 경배하지 않고 찬양하지 않고 구령하지 않으면 하나님께 상을 받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올바른 삶에 더해 직접적인 주님의 일에 동참해야 한다.
오늘날 사람들은 거룩한 것과 속된 것을 구별하지 말라고 한다. 너무 구별하면 “이원론”이 된다고 한다. 그러나 성경은 어디를 보아도 흑과 백을 철저히 구별하고 있다. 10절은 거룩한 것과 거룩하지 않은 것을 구별하라 하시고, 또 불결한 것과 깨끗한 것도 구별하라 말씀하신다. 즉 선과 악도 구별해야 하지만(정결과 불결), 하나님의 일과 일반적인 일도 구별해야 한다(거룩과 속된 것). 우리의 삶은 죄를 짓느냐 안 짓느냐의 기준으로 살 것이 아니라, 더 의로운 일을 행하기 위해, 더 하나님의 일을 행하기 위해 영위되어야 하는 것이다.
오늘날은 거룩한 것과 속된 것, 더욱이 선과 악도 혼합되어 있는 세상이다. 그리스도인들마저도 이 구분을 하지 않는다. 그리스도인이 세상 가운데서 세상과 타협하고 있는데도, 세상 문화가 교회 안으로 들어와 있는데도 전혀 문제시하지 않는다.
사실 이렇게 된 데에는 칼빈주의의 영향도 있다. 칼빈은 “직업소명설”이라는 이론을 제시했는데, 이는 성직자만이 아니라 모든 직업이 거룩하다는 것이다. 이것은 언뜻 보기에는 매우 건전한 이론 같아 보인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지만, 당시 카톨릭에서는 성직자와 평신도를 나누어서, 평신도를 지배하는 니콜라파 교리를 실행했기 때문에 칼빈은 그러한 구분을 없애고, 모든 성도들도 하나님 앞에서 부르심을 받았다고 믿게 했다. 문제는 직업 자체에 대한 소명론까지 제시했다는 것이다.
칼빈의 생각은,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은 성직자로 부르시고 어떤 사람은 장사꾼으로 부르셨다면 장사꾼이 거룩하지 말아야 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즉 하나님께서는 어떤 사람은 창세 전부터 성직자로 택해 놓으셨고, 어떤 사람은 창세 전부터 상인으로 택해 놓으셨다는 것이다. 이 이론은 중세의 니콜라파 이단 교리를 척결하는 데에는 다소 도움을 주었지만, 궁극적으로는 세상을 위해 사는 것도 곧 하나님을 위해 사는 것이라는 이상한 교리를 도출해 내게 되었다. 또한 예정론을 근거로 한 교리이기 때문에 옳지 못하다.
그렇다면 성직자는 거룩하고 평신도는 그렇지 않다는 카톨릭의 교리가 옳단 말인가? 물론 아니다. 어차피 모든 “성도”는 거룩하다.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구원받은 성도들은 거룩하게 되었다. 문제는 어떤 사람이 거룩하고 어떤 사람이 거룩하지 않느냐 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일이 그러하냐 하는 것이다. 우리가 세상에서 정직하고 올바르게 살며 자기 직업에 충실하게 살 때 그것은 매우 정상적인 삶이지만, 그것 자체가 하나님의 일은 아니라는 말이다. 우리는 그러한 정직한 삶을 사는 가운데 시간을 내어 복음 전파라든지 찬양이라든지 그리스도를 위한 봉사라든지, 여하튼 하나님의 구체적인 일들을 해야 한다. 그럴 때 하나님께로부터 상을 받게 된다. 열심히 살았다는 것 자체로 그리스도의 심판석에서 상을 받지는 않는다.
반면 정직하게 살면서도 세상을 위해 사는 사람들이 얼마든지 있다. 우리는 그런 일들이 모두 하나님의 일이라고 말해서는 안 된다. 사람들은 정치를 하면서도, 돈을 벌면서도, 노동 운동을 하면서도, 연예활동을 하면서도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하는 하나님의 일꾼이라고 생각한다. 오늘날은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꽤 많다. 아니 그런 생각이 오늘날 교계의 대세이다.
이것은 더 나아가 세상을 아름답게 개혁해야 한다는 교리로 발전하게 되었고(무천년주의가 바로 그렇다.), 오늘날 수많은 “썬데이 크리스찬”을 양성해 내게 되었다. 그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일한다고 하지만, 사실은 전혀 하나님의 일을 하지 않는 사람들이다. 이에 대해 이사야 5:20은 분명하게 경고한다. 『악을 선하다 하고 선을 악하다 하는 자들과 빛 대신 어두움을, 어두움 대신에 빛을 두며, 단 것 대신에 쓴 것을, 쓴 것 대신에 단 것을 두는 자들에게 화로다!』 B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