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서와 그리스도의 생애 분류
산상설교와 갈릴리에서의 표적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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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대로믿는사람들 <2009년 05월호>
#40. [ A.D. 27년 ․ 갈릴리의 ‘한 산에서’ ․ 마 5:1-7:29 / 막 / 눅 / 요 ] 산상설교마태복음 5-7장은 산상설교(山上說敎)로 불린다. 마태복음 5:1에서 산에 올라가셨고, 마태복음 8:1에서 산에서 내려오셨다. 반면 누가복음 6:20-49은 마태복음의 산상설교와 대비하여 평지에서의 설교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누가복음 6:17에서 평지에 서서 말씀하신다. 그러나 대부분의 학자들은 전후 사건과 내용이 유사한 점을 들어 같은 것으로 해석하는 오류를 범하고 있다. 특히 이스라엘과 교회의 구분 없이 적용하는 것이 더 큰 문제이다.
교리적으로 산상설교는 왕국의 헌법으로, 그 대상은 이스라엘이다. 또한 예언적으로 왕국 이전에 환란의 상황에 적용된다. 산상설교는 교회가 있기 이전, 즉 그리스도인이 없던 시기임을 분명히 깨달아야 한다. (한편 마태복음 4:24,25에서 이방인들도 유대인의 왕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을 통해 복을 받았듯이, 교회가 아닌 이방인들이 왕국 이전의 환란 시대와 왕국에 존재하기 때문에 이스라엘 중심의 환란과 왕국에서 완전히 배제되는 것은 아니다. 다만 교회, 즉 그리스도인을 대상으로 하는 해석을 배제하면 된다.)
#41. [ A.D. 27년 ․ 갈릴리의 어떤 성읍 ․ 마 8:1-4 / 막 1:40-45 / 눅 5:12-15 / 요 ] 한 문둥병자를 고치셨다.
문둥병은 불결함과 죄를 상징하는 역할을 했으며(레 13,14장) 치료할 수 없는 병으로 여겨졌다. 구약에서 세 번 문둥병의 치료에 대한 기록이 있다(출 4장, 민 12장, 왕하 5장). 그런데 이 문둥병자는 주님께 와서 간청하며 『주여, 주께서 원하시면 저를 깨끗게 하실 수 있나이다.』(마 8:2; 참조 - 막 1:40, 눅 5:12)라고 고백했는데, 주님을 믿고 담대하게 요청했던 것이다. 주님께서는 가엾게 여겨 『내가 원하노니 깨끗해지라.』(마 8:3, 막 1:41, 눅 5:13)고 말씀하심으로 그가 깨끗해졌다. “주께서 원하시면”이라고 주님의 뜻대로 구하는 것은 매우 성경적인 간구 방법이다.
그리스도께서는 문둥병을 치유받은 자에게 엄히 당부하시어 아무에게도 어떤 말도 하지 말고 그의 몸을 제사장에게 가서 보이며, 모세가 명한 대로 그가 정결케 된 것으로 인하여 예물을 드려 제사장들에게 증거로 삼으라고 하셨다(마 8:4, 막 1:43,44, 눅 5:14). 복음서 여러 곳에서 주님의 기적을 말하지 말라고 당부하신 것은 이유가 있다. 물론 천국 복음과 표적으로서의 기적은 동반되는 것이며 예수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입증하는 것이지만, 이것이 잘못된 육신적 요구나 바람들로 인해 주님을 바르게 믿고 따르지 못하게 할 수 있었다. 보리 빵 다섯 덩어리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을 먹이신 기적을 보이신 이후에도 사람들은 억지로 주님을 왕으로 삼고자 했었다. 육신적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잘못된 행동이었다. 주님의 당부를 지키지 않은 결과 마가복음 1:45에 따르면, 예수께서 더 이상 드러나게 마을로 들어가실 수 없게 되어 마을 밖의 외딴 곳에 계시게 되었다.
#42. [ A.D. 27년 ․ 광야 ․ 마 / 막 / 눅 5:16 / 요 ] 광야로 물러가서 기도하셨다.
한 문둥병자를 치유하신 기적(마 8:1-4, 막 1:40-45, 눅 5:12-15)이 알려진 이후(마 1:45) 마을 밖 외딴 곳에 계셨는데, 누가복음은 이 기적을 베푸신 이후에 광야로 물러가서 기도하셨음을 기록하고 있다.
#43. [ A.D. 27년 ․ 갈릴리 ․ 마 / 막 / 눅 5:17 / 요 ] 예수께서 갈릴리와 유대와 예루살렘에서 온 사람들을 가르치시고 치유하셨다.
누가복음 5:17은 이 시점을 단지 “어느 날”이라고 적고 있다. 또 그 날 주님과 함께 바리새인들과 율법 박사들도 그 곁에 앉아 있었다. 유대인 종교지도자들은 주님께서 사역하시는 장소에 자주 참여하여 주님의 가르치심과 기적들을 목격하거나 전해 들었다.
#44. [ A.D. 27년 ․ 갈릴리 카퍼나움 ․ 마 9:1-8 / 막 2:1-12 / 눅 5:18-26 / 요 ] 침상에 누운 중풍병자를 고치셨다.
마태복음 9:1은 『그리고 주께서 배를 타고 건너가 자기 성읍에 도착하시니라.』고 말씀하는데, 마가복음 2:1은 『며칠 후에 주께서 다시 카퍼나움으로 들어가셨는데』라고 기록함으로써 “자기 성읍”이라고 부른 곳이 “카퍼나움”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침상에 누운 채로 주님 앞에 내려진 중풍병자에게 주님께서 “네 죄들이 용서받았느니라.”고 말씀하심으로 주님께서 세상에서(땅 위에서) 죄들을 용서하는 권세를 가지신 분인 것을 알려 주셨다(마 9:6, 막 2:10, 눅 5:24).
#45. [ A.D. 27년 ․ 갈릴리 ․ 마 9:9 / 막 2:13-14 / 눅 5:27-28 / 요 ] 마태(레위)를 부르셨다.
마태복음은 마태라고 부르고, 마가복음은 알패오의 아들 레위라고, 누가복음은 레위라고 부른다. 한 사람이 두세 가지 이름들로 불리는 것은 일상적인 것이었다. 세무서에 앉아 있는 마태에게 “나를 따라오라.”고 부르시자 주님을 따라갔다. 마태는 주님의 사역이 시작된 지 약 1년 정도 되었을 때에 부름받고 주님을 따랐다.
#46. [ A.D. 27년 ․ 갈릴리 ․ 마 9:10-17 / 막 2:15-22 / 눅 5:29-39 / 요 ] 마태의 집에서 세리들과 죄인들과 함께 식사하셨고,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과 요한의 제자들에게 금식에 대해 답변하시고, 또 새 천조각과 새 포도주, 새 가죽 부대에 관해 말씀하셨다.
마태복음은 바리새인들이, 마가복음과 누가복음은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예수님께서 세리들과 죄인들과 함께 앉아서 드시는 것에 대해 질문한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예수님의 답변에서 병든 자들에게는 “은사주의자들”의 치유가 아니라 “의사”가 필요하다는 말씀을 주의해 보아야 한다(마 9:12, 막 2:17, 눅 5:31). 또한 죄인들을 회개에 이르게 하려고 오셨다는 말씀 역시 중요한 선언이다(마 9:13, 막 2:17, 눅 5:32).
마태복음은 금식에 대해 질문한 사람들을 요한의 제자들이라고 기록하고(마 9:14), 마가복음은 단지 “사람들”이 와서 요한과 바리새인들은 자주 금식한다며 금식에 대해 질문하는 것으로 기록한다. 누가복음은 “그들,” 즉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요한과 바리새인들은 자주 금식하는데 주님의 제자들이 금식하지 않는 것에 관해 질문한 것으로 기록한다. 이것을 종합하면 이들 모두가 주님께 질문한 것이다.
주님은 “신혼방의 아이들”이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에는 슬퍼하지 않지만, 신랑을 빼앗길 날들이 오면 금식할 것이라고 답변하신다. 교리적으로 정확히 알아야 할 부분이다. “신혼방의 아이들”은 두 가지 이유에서 이스라엘을 말한다. 첫째, 신랑인 하나님과 함께 있는 “여호와의 신부”(호 1-3장, 사 62:4,5)로서의 이스라엘 자녀이다. 호세아에서 하나님은 이스라엘 땅과 결혼하는 신랑으로 기록된다. 따라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스라엘의 자녀로서 그 아이들이 된다. 둘째, 신부인 교회와 함께 있는 신랑으로서의 예수 그리스도를 수행하는 수종드는 자로서의 이스라엘 백성이며, 그들은 예수님께서 오실 때 그분을 수행할 것이다(시 45편, 솔 6:8-10). 그러므로 이 구절은 그리스도의 죽음과 장사됨과 부활하심 이후 예수께서 “그들로부터 취해졌을 때”(요 14:28) 그들이 금식하기 시작했다는 것을 나타내준다. 그리고 그 이후의 금식은 사도행전에서 교회도 행했다(행 13:1-3; 14:23, 고후 11:27). 그러나 이 말씀의 예언적인 의미는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그분의 신부를 앗아가, 완전히 신부에게 가 버리신 이후인 대환란 기간에 이스라엘은 금식하며 울부짖는다는 것이다.
새 천조각과 낡은 옷에 대한 비유는 포도주에 대한 비유에서 그 의미가 명확하게 나타난다. “새 포도주”는 “새 천조각”과 같고, “낡은 가죽 부대”는 “낡은 옷”과 같다. “새 포도주”는 성령의 모형 중의 하나이다(행 2:13, 마 26:29, 엡 5:18). “새 포도주”가 성령을 말하기 때문에 “새 가죽 부대”는 내주하시는 성령을 받아들이는 “새로운 백성”을 말한다. “낡은 옷”과 “낡은 가죽 부대”로 묘사되는 이스라엘은 이 요구를 충족시킬 수 없다. 이 비유는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 이전의 사역과 이후의 사역의 차이점을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거듭날 때까지는 아무도 새 가죽 부대나 새 천조각이 될 수 없다. 예수님께서는 “그리스도의 몸”이 다가오는 것에 대해서 유대인 청중들에게 언급하셨으나, 아직까지는 이 진리가 그들에게 온전히 닫혀 있었다.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시기에 앞서 침례인 요한의 제자들이 질문을 했다는 것은(마 9:14) 매우 의미있다. 왜냐하면 요한은 “율법과 선지자들의 마침”이기 때문이다(눅 16:16). 그는 그리스도의 신부의 일부가 아니다(요 3:29). 그러므로 이 비유는 세대를 구분하는 것이다. B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