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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기 예루살렘/유대 사역 (5) - "양들이 그를 따라가나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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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대로믿는사람들 <2011년 02월호>
#122[ A.D. 29년 9-10월 ․ 예루살렘 ․ 마 / 막 / 눅 / 요 10:1-21 ] 목자를 따르는 양들에 대한 비유와, 선한 목자에 관해서 말씀하셨다.
요한복음 10장은 9장의 연속이다. 9장은 소경이었다가 보게 된 한 사람으로 인해 바리새인들을 비롯한 유대인 종교지도자들이 예수님을 배격한 것과 예수님께 "바리새인들"을 보지 못하는 소경이며 죄인들이라고 지적하시는 말씀으로 끝난다(9:40-41).
이제 10장은 『진실로 진실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양우리에 문으로 들어가지 아니하고 다른 길로 넘어 들어가는 자는 도둑이요 강도라.』(10:1)는 말씀으로 시작하는데, 여기서 "너희"는 9장의 바리새인들이다(요 10:19-21). 이런 사실은 다음과 같이 10:6의 말씀에서 확인된다. 『예수께서 이런 비유로 그들에게 말씀하시더라. 그러나 그들은 주께서 자기들에게 말씀하신 것이 무엇인지 깨닫지 못하니라.』 10장에서도 "그들," 곧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깨닫지 못했다. 그래서 10:7은 『그러므로 예수께서 다시 그들에게 말씀하시기를...』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물론 9장의 연속적인 상황이기 때문에 바리새인들뿐만 아니라 예수님의 제자들과 그 외의 다른 사람들도 청중으로 있었다. 그러나 10:1-21은 바리새인들을 향해 선포하신 말씀으로 기록되어 있다.
10:1-21은 1-6절까지 한 단락의 말씀으로 하나의 비유이고, 이 비유의 말씀을 깨닫지 못한 바리새인들에게 7-18절까지 예수님께서 다시 말씀하시는 것이 또 다른 한 단락이다. 그리고 19-21절은 두 번에 걸친 예수님의 말씀을 깨닫지 못하고 믿지도 못한 바리새인들과 일부 믿는 유대인들 사이의 논쟁이 기록되어 있다.
1. 바리새인들이 깨닫지 못한 "비유"(10:1-6)
10:6은 1-5절의 내용이 "비유"라고 말씀한다. 대부분의 주석가들은 7-18절이 이 비유에 대한 설명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들은 단순히 비유와 그것에 대한 설명으로 보기 때문에 10장의 교리적 진리를 전혀 깨닫지 못하고 설명하지도 못한다. 이 비유에서 발견되는 진리의 지식은 무엇일까? 성경 구절을 먼저 주의 깊게 읽기 바란다.
요한복음 10:1-6
1 "진실로 진실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양우리에 문으로 들어가지 아니하고 다른 길로 넘어 들어가는 자는 도둑이요 강도라.
2 그러나 문으로 들어가는 이는 양의 목자라.
3 그에게 문지기가 문을 열면 양들은 그의 음성을 듣나니, 그러면 그는 자기 자신의 양들의 이름을 불러서 이끌어 내느니라.
4 그가 자기 양들을 이끌어 낸 후 양떼 앞에서 걸어가면 양들이 그를 따라가나니 이는 양들이 그의 음성을 알기 때문이라.
5 그러나 그들이 낯선 사람은 따라가지 아니하고 오히려 그에게서 달아나나니, 이는 그들이 낯선 사람의 음성을 모르기 때문이라."
6 예수께서 이런 비유로 그들에게 말씀하시더라. 그러나 그들은 주께서 자기들에게 말씀하신 것이 무엇인지 깨닫지 못하니라.
(1) 1,2,3절의 문은 셋째 하늘에 있는 문이다. 이 문은 실제로 열리고 닫히는 문이다(창 28:17, 요 1:51 참조). 또한 이 문은 "그리스도 자신에 대한 상징"이기도 하며, "그리스도의 죽음"과 연관이 있다. 이런 사실을 히브리서 10:19,20에서는 다음과 같이 확인할 수 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로 인하여 담대하게 지성소에 들어가나니, 그가 우리를 위해 바치신 새롭고 살아 있는 길로 휘장, 곧 그의 육체를 통하여 들어가느니라.』 이 지성소는 셋째 하늘의 지성소이다. 하늘의 모형이 지상의 성막과 성전이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셨을 때 성전의 휘장이 위에서 아래까지 둘로 찢어진 것은(마 27:51)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아버지 하나님 앞으로 나아갈 길이 새롭게 생긴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양우리에 "문"으로 들어가지 아니하고 "다른 길"로 넘어 들어가는 자는 도둑이요 강도라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모형적으로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단지 죄를 짊어지시는 것이 아니라 죄가 의인화되어 예수님께서 죄 자체가 되심으로써 "사탄"의 자리를 취하신 것을 나타내 보여 준다. 즉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들어올린 것같이 인자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렇게 들려 올려지신 것을 말씀하는 것이다(요 3:14).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께서는 죄를 담당하시되, 죄 자체가 되심으로써 모든 죄를 해결하신 것이다.
(2) 1절에서, 양우리에 "문"으로 들어가지 아니하고 "다른 길로 넘어 들어가는 자"는 도둑이요 강도라고 말씀하시는데, 이사야 14:12-14에 따르면, "다른 길로 넘어 들어가는" 것을 선택한 자는 바로 사탄이었다. 그러나 <개역성경>과 <개역개정판>을 비롯한 변개된 성경들은 이사아 14:12에 기록된 "루시퍼," 즉 "사탄"을 예수 그리스도라고 심각하게 변개해 놓음으로써(계 22:16 참조), 사탄의 실체를 가리는 것은 물론, 이 진리를 훼손시키고 있다.
(3) 1,2,3절의 "문"은 모든 주석가들이 생각했던 것처럼 단지 예수 그리스도가 아니다. 주의 깊게 이 구절들을 읽으면 문과 목자가 동시에 예수 그리스도일 수 없음을 알게 될 것이다. 특히 2,3절의 『그러나 문으로 들어가는 이는 양의 목자라. 그에게[목자에게] 문지기가 문을 열면 양들은 그의[목자의] 음성을 듣나니, 그러면 그는[목자는] 자기 자신의 양들의 이름을 불러서 이끌어 내느니라.』는 말씀에 따르면, 이 "문"과 "목자"가 다르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만일 문도 그리스도이고, 목자도 그리스도라면 이 구절은 상식적으로 말이 되지 않는다.
그러나 10:7-18을 10:1-6의 비유에 대한 설명으로 이해하고 주석하는 모든 학자들은 이 비유에 나타난 진리의 지식에 전혀 무지할 뿐만 아니라 해석에 있어서도 큰 오류를 범하고 있다. 10:7의 『그러므로 예수께서 다시 그들에게 말씀하시기를 "진실로 진실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나는 양들의 문이라.』는 말씀과 10:11의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자기 생명을 내어 놓으나』라는 말씀을 가져와서 1-3절의 문을 그리스도라고 하고, 또 목자를 그리스도라고 한다. 그러나 이런 해석이 틀린 것은, "문으로 들어가시는 분이 선한 목자이시다."라는 말은 맞지만, "선한 목자로 들어가시는 분은 선한 목자이시다."라는 말이나, "그 문이 문으로 들어간다."는 말이 맞지 않는 것을 통해 쉽게 분별할 수 있다. 이것은 마치 학자들이 "하나님의 나라"(the kingdom of God)와 "천국"(the kingdom of heaven)이 같은 것이라고 주장함으로써 "하나님"이 "하늘"이다라는 잘못된 논리를 펴게 하는 것과 같은 오류를 범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10:7-18의 말씀을 10:1-6의 비유에 대한 설명이라고 주석하는 모든 학자들이 틀렸다는 것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
(4) 양은 "교리적으로" 모든 구원받은 유대인을 지칭한다(겔 37장, 눅 15장). 한편 "영적으로" 양은 그리스도의 몸의 모든 지체를 지칭한다(벧전 2:25).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사로를 부르셨던 것같이 목자이신 그분께서는 자기 자신의 양들의 이름을 부르신다(요 10:3). 앞으로 이 부르심은 데살로니가전서 4:13-18, 고린도전서 15:50-54, 욥기 37:1-4에 기록된 "휴거"가 될 것이다. 목자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양들을 하늘로 불러 올리실 때, 그들의 이름을 불러서 "이끌어 내실"(out) 것이다(요 10:3) - 『그에게 문지기가 문을 열면 양들은 그의 음성을 듣나니, 그러면 그는 자기 자신의 양들의 이름을 불러서(calleth) 이끌어(leadeth) 내느니라(out).』
이와 같이 목자이신 주님께서 그들을 불러 올려 이끌어 내신 후에 그들 앞에 가실 것이다. 양무리인 교회를 뜻하는 헬라어 "에클레시아"의 의미는 "불러냄을 받은 모임"(called out assembly)라는 뜻이다. 유대인의 입장에서 세상 체계로부터 불러냄을 받은 것이 "출애굽"(Exodus)이었듯이 앞으로 미래에 있게 될 교회의 휴거는 말 그대로 세상으로부터 불러냄을 받은 성도들이 하늘로 끌려 올라가는 것이다. 성도들이 이 세상으로부터 불러냄을 받는 거대한 "Exodus"가 휴거이다.
(5) 목자인 주님께서 양들을 이끌어 내신 후에 셋째 하늘에서 그리스도의 심판석과 어린양 혼인식을 마치고, 이 땅으로 다시 돌아와 그들을 "초장"으로 인도하신다(요 10:9 참조). 이 초장은 "천년왕국"이 될 것이다. 이 땅으로 돌아올 때, 즉 재림하실 때, 주님께서는 군대 대장으로서 앞에 가신다(사 63:1-6,10-14, 계 19:11-16). 이런 모습은 주님께서 "나를 따르라"는 군대의 모토를 실제로 보여 주시는 것이다. 요한복음 10:4의 『그가 자기 양들을 이끌어 낸 후 양떼 앞에서 걸어가면 양들이 그를 따라가나니 이는 양들이 그의 음성을 알기 때문이라.』는 말씀이 바로 이런 모습이다.
이사야 63장과 요한계시록 19장에서는 이 장엄한 모습을 생생하게 기록하고 있다. 셋째 하늘의 문이 열리고(계 19:11) 흰 말을 타신 만왕의 왕, 만주의 주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앞서 가시고 그 뒤를 정결한 흰 세마포를 입은 하늘에 있는 군대들, 곧 성도들(양들)이 따른다(계 19:14). 특히 셋째 하늘의 문이 열리고 주님께서 성도들과 함께 둘째 하늘과 셋째 하늘 사이에 있는 "깊음"의 바다를 통과하는 모습을 이사야 63장에서는 이렇게 말씀하고 있다. 『11 그때에 주께서 옛적의 날들과 모세와 그의 백성들을 기억하여 말씀하기를 "자기 양무리의 목자와 더불어 그들을 바다에서 데리고 올라온 이가 어디 있느냐? 그 안에 그의 거룩한 영을 둔 이가 어디 있느냐? 12 그의 영광스러운 팔과 모세의 오른손을 통해 그들을 인도하고, 그들 앞에서 물을 나누고 친히 영원한 이름이 된 이가 어디 있느냐? 13 그들을 광야에 있는 말처럼 깊음을 통하여 인도하고, 그들로 넘어지지 않게 한 이가 어디 있느냐?" 하셨느니라. 14 골짜기로 내려가는 짐승같이 주의 영이 그를 쉬게 하셨으니 주께서는 이처럼 주의 백성을 인도하셔서 친히 영광스러운 이름이 되셨나이다.』
양들이 목자의 음성을 알듯이 성도들은 자신들의 대장인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음성을 안다. 그런데 성도들의 "구원의 대장"(captain, 히 2:10)이라는 그 영예로운 이름이 변개된 성경들에서 삭제되었다. <개역성경>과 <개역개정판>을 비롯한 변개된 성경들은 히브리서 2:10에서 "대장"을 없애고 "창시자" 혹은 "개척자"라고 바꾸어 버렸다.
(6) 양들이 따르지 않는 "낯선 사람"이 5절에 나오는데, 이 비유에서 낯선 사람이 누구인가에 대해서는 성경을 찾아보면 분명해진다. "낯선 사람"(stranger)이라는 단어는 "낯선 남자"만이 아니라 "낯선 여자"(잠 2:16 - "타국 여인", 느 13:26-29 - "이방 나라 여인들, 타국의 아내들")도 대표하는데, 창녀(위대한 바빌론), 곧 "멸망의 아들"이다. 이것은 대환란 때의 바빌론에 대한 요한계시록의 말씀들을 설명해 주고(계 18:4), 또 솔로몬의 잠언에 나오는 명철이 없는 한 청년에 대한 설명이기도 하다(잠 7:5,7). 성경에서 악한 여인은 낯선 "타국 여인"으로 언급된다(잠 6:24).
요한복음 10:5의 "낯선 사람"은 첫째, 적그리스도이고, 둘째, 그의 거짓 선지자이고(계 13:11-14), 셋째, 그의 신부이고(계 17장), 넷째, 그의 열 왕들이다(단 2장, 계 17:12). 또한 선한 목자인 주님보다 앞에 온 종교지도자들이다. 이들과 이들을 따르는 사람들 중에 누구라도 하늘의 문으로 올라가는 어떤 다른 길을 제시한다면 "길"이신 "그분,"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벗어난 것이다. 다른 길을 제시하는 그 사람은 마귀의 앞잡이요 꼭두각시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엄중하게 "다른 길"을 경고하셨다(요 10:1). 이 다른 길은 물침례, 주의 만찬, 명상, 황금률, 거룩한 날들을 지키는 것, 성사 등 모든 선한 행위들이다. 이런 다른 길들은 결코 죄인을 하늘로 인도하지 못한다.
10:6 말씀에 따르면, 예수님께서 이런 비유로 바리새인들에게 말씀하셨으나, 그들은 주님께서 자기들에게 말씀하신 것이 무엇인지 깨닫지 못했다. 그들이 깨닫지 못한 것은 그들이 주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 양들이 아니기 때문이다.
양들인 성도들은 주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고 있다. 바로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목자의 음성을 듣기 위해서이다(요 10:3). 그 음성은 이렇게 말씀하신다. 『나의 사랑하는 이가 내게 일러 말하기를 "나의 사랑, 나의 어여쁜 자야, 일어나 떠나자. 보라, 겨울도 지나고 비도 그쳐 사라졌으며, 땅에는 꽃들이 피고 새들이 노래하는 때가 왔도다. 산비둘기의 소리가 우리의 땅에서 들리는도다. 무화과나무는 푸른 무화과들을 내고 포도 넝쿨은 부드러운 포도로 좋은 향기를 내는도다. 나의 사랑, 나의 어여쁜 자야, 일어나 떠나자." 하였도다』(솔 2:10-13). 그 음성은 요한계시록 4:1에서도 『이리 올라오라.』고 부르고 있다. (요한계시록 11:12은 환란 성도를 부르는 것이다.) BB
<다음 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