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진리의 말씀을 올바로 나누어 자신이 하나님 앞에 부끄럽지 않은 일꾼으로 인정받도록 공부하라(딤후 2:15).
BB칼럼 분류

마음의 병 : 의심과 욕심

컨텐츠 정보

본문

성경대로믿는사람들 <2020년 07월호>

『오직 믿음으로 구하고 아무것도 의심하지 말라. 의심하는 자는 마치 바람에 밀려 요동하는 바다 물결과 같으니... 두 마음을 품은 사람은 그의 모든 길에 안정이 없느니라』(약 1:6,8).

현대 “정신의학”은 사람들에게 생기는 여러 가지 정신병리적인 문제들, 즉 “정신병”과 “신경증”을 해결하는 것을 목표로 삼고 있다. 고전적인 분류법에 의하면, 정상적인 범주를 넘어 비정상적인 수준에까지 이르러서 일상생활이 불가능해지는 정신병리적인 문제를 “정신병”이라 불렀고, 정상적인 범주 내에 있으면서도 일상생활에 지장이나 불편을 초래하는 정신병리적인 문제는 “신경증”이라 칭해 왔다. 이런 분류 방식에 따르면, 조현병(정신분열증), 망상 등은 정신병에 해당하고, 우울, 불안 등은 신경증으로 분류된다. 그러나 우울이나 불안 같은 증상도 심해지면 정상적인 일상생활이 아예 불가능해지기 때문에, 이러한 분류는 편의상의 구분일 뿐이다.


정신의학은 어떤 정신적인 문제가 발생하면 그것을 “적응”이라는 관점에서 접근한다. 어떤 사람이 일상생활에 아무런 불편을 느끼지 않고 잘 적응하고 있으면 정신적으로 “건강한” 사람으로 본다. 반면에 일생생활에서 무언가 불편함을 느끼면 “부적응” 상태에 있는 것으로 판단하여 정신적으로 건강하지 못한 사람이라고 진단한다. 이런 관점에 따라 정신적으로 불편을 겪고 있던 어떤 사람을 불편을 느끼지 않게 해 주거나 일생생활에 지장이 없도록 “적응”시켜 주면 그의 정신질환은 치료된 것으로 여겨진다. 예를 들어 우울증을 겪고 있는 어떤 사람에게 “항우울제”를 처방해 주고, 그가 일정 기간이 지나서 약을 끊어도 우울해지지 않으면 치료된 것, 즉 적응된 것으로 여기는 것이다.


과학과 의학이 발달했다 해도 거듭나지 않은 “자연인들”(고전 2:14)은 “혼”과 “영”의 문제에 완전히 무지하다. 그래서 인류가 겪는 정신적인 문제를 “적응”이라는 개념 정도로밖에는 생각하지 못한다. 어떤 사람이 건전한 양심이 살아 있어서 자신이 “죄인”임을 인식하고 자신의 행위들에 대해 “죄의식”을 느끼면, 정신의학은 마음이 불편한 상태, 곧 “부적응” 상태에 있는 것으로 판단하여 그 사람을 “죄의식”으로부터 “자유롭게” 해 주려고 양심을 무뎌지게 만드는 약물과 상담으로 완전히 망쳐 놓은 후 성공적으로 “적응”시켰다고 착각한다. 죄를 지으면서도 죄의식을 느끼지 않게 함으로써 지옥행 열차에 태우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성경적으로 볼 때 죄의식을 느끼는 그 사람은 건전한 양심이 살아 있어서 구원받을 가능성이 높은, 아주 바람직한 상태에 있다고 할 수 있다. 구원의 복음이 그의 건전한 양심을 화살처럼 찌르면, 그는 그 고통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의지하고 진정한 “자유”를 얻게 될 것이다. 『진리를 알게 되리니 그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요 8:32). 이렇듯 세상의 정신의학이 인간을 바라보는 관점은 성경과 정반대인 것이다.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은 구원의 복음을 믿음으로써 하나님의 자녀가 된 사람이고, 성령님께서 그 사람 안에 내주하시면서 그의 삶을 인도하신다. 특히 진리로 인도하셔서 그 진리에 순종하게 하신다. 『그러나 진리의 영이신 그분이 오시면 너희를 모든 진리로 인도하시리라』(요 16:13). 『너희가 성령을 통하여 진리에 순종함으로써 너희 혼들을 정결케 하여』(벧전 1:22). 따라서 내주하시는 성령님의 인도를 따르면 항상 진리를 깨달을 수 있고, 또 그 진리에 순종하면 혼이 정결케 되어 “마음의 병”에 걸리지 않게 된다.

구원받지 않은 사람이라면 위험하지도 않고 당연한 것으로 여겼을 “마음의 병”이 있는데, 그중 하나가 “의심”이다. 세상 사람들은 먼저 의심해 보는 것을 현명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의심에는 일견 긍정적인 측면이 있다. 세상은 악하고, 사람들은 서로 속고 속이기 때문이다. 『악한 사람들과 사기꾼들은 더욱 악해져서 속이기도 하고 속기도 하리라』(딤후 3:13). 속이려는 자들이 많기에 일단 의심하고 보는 것이 삶의 위험을 방지하는 현명한 처세술일 수 있다. “광고들”을 보라! 우리의 주머니를 노리면서 얼마나 그럴듯한 거짓말을 해 대는지 실로 놀라울 따름이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우리에게 “정보”를 준다고 말한다. 이렇듯 세상의 거짓말들을 신중하게 살피면서 속지 않으려고 해 보지만, 한 번도 속지 않고 산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순진하게 믿었다가 마음속 깊은 곳에 “인간에 대한 불신”만 갖게 된 사람들이 은근히 많은 것이다. 그러나 속아 넘어간 그들도 작은 이익을 얻기 위해 다른 사람들을 속였을지 모른다. 『실로, 하나님은 참되시나 사람은 모두 거짓말쟁이라』(롬 3:4).


악한 현 세상에서는 속이려는 자들이 더 많아지기 때문에 과도하게 의심하면서 방어적으로 사는 사람들에게 동정심마저 생긴다. 그러나 그들은 정도가 너무 지나치다 보니 의심해야 할 것과 의심하지 말아야 할 것을 구분조차 못한 채 무조건 의심하는 병적인 수준에까지 이르고 말았다. 이들의 수준은 가히 “피해망상 수준”이다. 하지만 그들은 그런 사실을 알지 못한다. 그렇기에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성도들을 의심의 눈초리로 바라보고,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의심도 건전하고 합리적인 의심으로 생각해 버린다. 하나님께서 무지한 인간을 속이기 위해 성경을 기록하셨겠는가? 우리나라의 경우 교회들이 변개된 개역성경을 가지고 사람들을 너무 많이 속여 왔기에 교회와 성경을 의심하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다. 그런 점에서 교단 교회들은 하나님의 이름을 들먹거리면서 돈을 버는 장사꾼들에 불과하다.

그렇다면 “의심”은 믿지 않는 세상 사람들만의 전유물인가? 이미 하나님의 말씀을 “믿음”으로써 구원받은 그리스도인도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거절하고 육신적인 상태에 머무르면 “의심”의 병에 걸릴 수 있다. “의심”도 질병처럼 예방과 치료가 모두 중요하다. 결코 자연 치유되지 않으며, 방치를 하면 더욱 위험해질 뿐이다. 그 예방법은 “의심하지 않고 믿음에 머무는 것”이고, 그 치료법도 “의심을 버리고 믿음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원래의 믿음으로 돌아가는 것, 그것이 바로 모든 문제를 해결하는 핵심인 것이다.


모든 질병이 그렇듯이 의심이라는 질병에도 원인이 있다. 성경은 의심의 원인을 “교만”이라고 말씀하신다. 『그는 교만해서 아무것도 아는 것이 없고 다만 질문과 언쟁만을 좋아하는 자니, 거기서 시기와 다툼과 악담과 사악한 의심이 생겨나며』(딤전 6:4). 교만한 사람은 성령님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고 자기 생각을 성령님의 권위 위에 둔다. 바로 “거기서” 사악한 의심이 생겨나는 것이다. 또한 성경은 의심이 죄라고 단호하게 말씀하신다. 『그러나 의심하는 자는 그가 먹을지라도 정죄되었나니 이는 믿음으로 먹지 아니하였기 때문이니라. 믿음으로 아니하는 모든 것이 죄니라』(롬 14:23).


“의심”도 방치하면 합병증을 일으킨다. 현명한 그리스도인은 자기 마음 안에 생겨난 의심을 감지하는 즉시 교만한 마음을 내려놓고, 성령님의 인도하심에 따라 원래의 믿음으로 돌아간다. 그러나 자신의 교만을 내려놓지 못하는 그리스도인은 의심을 부여잡으면서, 의심이라는 마음의 병이 가져오는 모든 증상을 다 겪는다. 일단 “의심”은 마음의 안정을 상실하게 하고, 곧이어 “불안,” “염려, “근심” 등을 일으킨다. 결국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화평” 속에서(요 14:27) 쉼을 얻고 있었던(마 11:28) 성도가 마음의 안정뿐만 아니라 모든 길에서 안정을 잃어버리는 것이다. 『오직 믿음으로 구하고 아무것도 의심하지 말라. 의심하는 자는 마치 바람에 밀려 요동하는 바다 물결과 같으니... 두 마음을 품은 사람은 그의 모든 길에 안정이 없느니라』(약 1:6,8). “의심”하는 자는 두 마음을 품은 사람으로서, 바람에 밀려 요동하는 바다 물결처럼 안정을 잃게 되어 삶의 모든 것이 “근심거리”가 된다. 이에 관한 치료책은 다시 본래의 믿음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도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너희가 하나님을 믿으니 또한 나를 믿으라.』(요 14:1)라고 말씀하셨다.

거듭나지 않은 죄인이라면 위험하지도 않고 당연한 것으로 여겼을 “마음의 병”으로는 “의심”과 더불어 “욕심”이 있다. 세상 사람들은 어느 정도는 “욕심”을 가지고 있어야 세상에서 뭔가를 성취하고 성공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욕심”이 없는 사람을 무능하게 생각하거나 도태된 사람으로 여기기까지 한다. 그러나 욕심이란 분수에 넘치게 무엇을 탐내거나 누리고자 하는 마음을 의미한다. 영원한 소망이 없는 그들로서는 세상에 대해 욕심을 갖는 것이 당연한 일인지 모르겠으나, 눈에 보이지 않는 영원한 것들을 바라보는 그리스도인은 자기의 마음을 욕심으로부터 지켜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생명까지 위험해질 수 있다. 『그러므로 욕심이 잉태하면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하면 사망을 낳느니라』(약 1:15).


성경은 매우 강력하게 “욕심”에 대해 부정적으로 말씀하신다.

첫째, 육신이 성령을 거슬러 욕심을 부린다. 『육신은 성령을 거슬러 욕심을 부리며 성령은 육신을 거스르나니 이들은 서로 반목하여서 너희가 하고자 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느니라』(갈 5:17).

둘째, 욕심은 열매를 맺지 못하게 한다. 『욕심이 들어와, 말씀을 억눌러 열매를 맺지 못하는 자들이요』(막 4:19).

셋째, 욕심은 불결한 것을 행하게 한다. 『감각을 상실하여 자신을 방탕에 내어주어 욕심으로 모든 불결한 것을 행하느니라』(엡 4:19).

넷째, 욕심은 믿음에서 떠나 방황하게 한다. 『돈을 사랑하는 것이 모든 악의 뿌리니, 이것을 욕심내는 어떤 사람들이 믿음에서 떠나 방황하다가 많은 슬픔으로 자신들을 찔렀도다』(딤전 6:10).

다섯째, 욕심은 유업을 잃게 한다. 『너희가 이것을 알거니와 음행하는 자나 더러운 자나 욕심 많은 자, 곧 우상 숭배자는 누구든지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왕국에서 상속받을 것이 없느니라』(엡 5:5).


“의심”과 “욕심”은 일견 평범한 마음의 상태를 나타내는 말인 것처럼 생각될 수 있으나, 근본적으로는 “믿음”에서 멀어진 그리스도인의 비참한 상태를 표현하고 있다. 하나님의 말씀에서 멀어지면 “의심”이 생겨나 삶에 안정이 없게 되고, 세상으로 눈을 돌리면 “욕심”이 일어나 삶이 파괴된다. 그러므로 의심과 욕심을 갖지 않도록 유의해야 한다. 또한 성경은 욕심이 많은 자를 가리켜 “우상 숭배자”라고 말씀하신다(엡 5:5).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골 3:5). 하나님께서는 욕심과 탐심을 우상 숭배와 동일하게 취급하시는 것이다. 사도 바울도 그리스도인들에게 『만족할 줄 아는 경건은 큰 이익이 되느니라... 우리에게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으면 이것들로 만족할 것이니라.』(딤전 6:6,8)라고 말했다. 당신의 마음 안에 “의심”이나 “욕심”이 있는가? 주의하고, 다시 하나님의 말씀으로 돌아가서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따르라. BB

전체 938 / 14 페이지
RSS
번호
제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