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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의 자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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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대로믿는사람들 <2020년 08월호>
교인들은 많은데 정작 구원받은 그리스도인들의 수는 적고, 교회들은 많은데 복음과 진리를 전파하는 교회들이 드물며, 설교자들은 많은데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설교자들은 좀처럼 찾아보기 힘든 “기이한 상황”이 벌어지고 있다. 『주의 편은 누구냐?』(출 32:26) 『누가 나를 위하여 행악자들을 대적하여 일어나며 누가 나를 위하여 죄악을 행하는 자들을 대적하여 일어날까?』(시 94:16)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가랴?』(사 6:8) 하나님께서는 믿음을 찾아볼 수 없는 이 마지막 세대를 향해 묻고 계시지만, 마음이 완고하고 목이 굳은 그들은 여전히 “차가운 침묵”만 지키고 있다! 너무 냉랭해서 돌들이라도 즉시 소리칠 판이다!(눅 19:40)세상은 결코 그 지혜로 하나님을 알 수 없기에, 주님께서는 “복음 전파,” 곧 “설교”(preaching)의 어리석음으로 그 말씀을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다(고전 1:21). 『십자가를 전파하는 것[preaching]이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어리석은 것이지만 구원을 받은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전 1:18). 한 명의 그리스도인이 십자가에 못박히신 예수 그리스도를 전파하는 자리에 담대하게 서 있고, 항상 자신을 십자가에 못박는 삶을 살면 “하나님의 위대한 능력”이 나타나게 된다. 즉 올바른 설교자가 올바른 메시지를 들고 올바른 강단에 섰을 때, 수많은 잃어버린 혼들이 그가 전파하는 설교를 통해, 십자가에서 흘리신 피로 인류의 구속을 완성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받는 위대한 역사가 일어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부흥”이다!
이렇듯 “설교”를 신실하게 준비해서 능력 있게 전하는 일은 하나님의 가장 중요한 사역이다. 하지만 오늘날에는 하나님의 손에 강력하게 붙들린 신실하고 유능한 설교자를 찾아보기 어렵다. 강단을 지켰던 거성들은 제한된 수명과 죽음의 그림자에 의해 하나둘씩 사라져 가고 없다. 샘 존스(1847-1906), 빌리 선데이(1862-1935), 프랭크 노리스(1877-1952), 밥 존스 시니어(1883-1968), 뷰챔 빅(1901-1975), 레스터 롤로프(1914-1982), 잭 하일스(1926-2001), 이안 페이슬리(1926-2014), 피터 럭크만(1921-2016)과 같은 설교자들, 이 어둡고 배교한 교회 시대에 바르게 보존된 성경과 성경적 믿음을 끝까지 지키면서 진리의 불빛을 밝혔던 역전의 용사들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없는 것이다. 필자는 지금 당장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이 지긋지긋하고 더러운 세상을 한시라도 빨리 떠나기를 간절히 바라지만, 만에 하나 주님께서 그 시기를 조금 더 늦추신다면, 이 땅에 남아 있는 우리는 과연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고, 또 어떤 준비를 해야 하는 것인가? 여기에는 한 가지 답변밖에 없으니, 그 훌륭한 믿음의 용사들, 신실한 설교자요 성경 교사였던 그 위대한 용사들의 자리를 대신할 수 있는 준비를 갖추어야 하고, 또 실제로 그렇게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 나라에 “가짜 교회들”이 많고 “비성경적인 교리들”이 만연하는 주된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교단의 교세 확장을 위해 난립한 거짓 목사들, 곧 자기들의 배를 하나님으로 섬기는(롬 16:18, 빌 3:19) “삯꾼 목사들” 때문이다. 구원받지도 않고, 바른 성경도 없으며, 성경적으로 설교할 수도, 가르칠 수도 없는바, 하나님께서 부르시지도 않은 무자격자들이 강단을 차지하고 있으니, 저주받을 이단 교리들과 교단 교리들이 양산되고, 소위 교계 안에 유명하다는 목사들의 입을 통해 퍼지고 말았다. “설교자”는 어떤 사람이 간절히 원한다고 해서 될 수 있는 것이 아니며, 하나님께서 그를 부르셨다는 확실한 “소명”(Divine Calling)이 있어야 한다. 이 소명은 그 설교자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그와 함께하시고 그의 설교에도 함께하신다는 사실을 깨닫게 함으로써 확신과 담대함을 갖게 해 준다(판 6:12, 출 33:14). 그렇다면 그렇게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설교자는 어떤 사람이고, 또 어떤 자격을 갖추어야 하는가?
1. 거듭난 그리스도인으로서 구원받은 간증과 확신이 분명해야 한다. 오늘날에는 거듭났다는 말이 자주 오용된다. 일요일만 되면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 종종 기독교란 종교에 관해 이야기하는 사람들, 정기적으로 헌금하고, 가끔씩 모임을 위해 돈을 내기도 하며, 주변 사람들이나 지역 사회로부터 인정받으려고 궂은일도 마다하지 않는 사람들, 때로는 목사를 집으로 초청해서 따뜻한 차 한 잔 대접하고 봉투를 건네주는 사람들 등을 그리스도인이라고 간주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들은 교인들이지, 거듭난 그리스도인들이 아니다. 이 나라에는 거듭나지 않았으면서도 목사를 하고 있고, 또 강단에서 설교하는 사람들이 부지기수이다. 그래서 다수의 소경들이 한 사람의 소경을 따라 지옥을 향해 질주하는 교회들이 많은 것이다.
신약 교회사에서 하나님께서 위대하게 쓰신 설교자들은 모두 구원받은 날짜나 시기에 관하여 분명히 알았고 확실한 구원 간증도 갖고 있었다. D.L. 무디는 1855년 5월 16일에 구원받았다고 간증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예수님을 영접한 이후 이튿날 아침, 방에서 나오던 일이 기억납니다. 태양은 전보다 훨씬 눈부시게 빛났고 마치 제게 미소 짓는 것 같았습니다.” 데이비드 브레이너드는 1739년 7월 12일에 평소 율법의 의를 통해 구원받는 것에 대해 고민하다가 숲속을 산책하던 중 예수님의 의만이 자신을 구원시킬 수 있음을 깨닫고 구원받았다. “나 같은 죄인 살리신”의 작사자 존 뉴턴은무신론자로 살아오다가 1748년 3월 9일 폭풍우가 치는 배 안에서 주님을 영접했다. 아도니람 저드슨은 목사의 아들로 태어나 자유분방하게 살다가 그에게 큰 영향을 끼친 친구의 죽음으로 큰 충격에 빠졌고, 그 일을 계기로 1808년 12월에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했다. 요한 웨슬리는 1738년 5월 21일 어떤 모임에서 루터의 로마서 주석서 서문을 읽는 것을 듣다가 구원받았다. 방탕하게 살았던 존 번연은 1653년(25세)에 거듭났고, A.W. 토저는 1915년(17세)에 애크런이라는 도시에서 독일 출신의 한 거리설교자가 전하는 복음 설교를 듣고 거듭났다. 필자는 1982년 초등학교 1학년(8세) 때 한 독립침례교회에서 주일학교 교사가 전해 준 복음을 듣고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어 구원받았다. 그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하늘을 보면서 “나도 이제 하늘나라에 갈 수 있겠구나!”라고 마음속으로 외치며 기뻐했던 기억이 난다.
자신이 언제 어떻게 구원받는지 성경적으로 정확하게 말할 수 없는 목사들은 모두 가짜들이다. 당신이 섬기는 교회의 목사는 정말로 구원받았는가? 지금 바로 확인해 보라! 『너희가 믿음 안에 있는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스스로 입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것을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못하면 너희는 버림받은 자들이라』(고후 13:5).
2. 하나님께서 주시는 지혜와 조명 속에서 올바르게 보존된 <한글킹제임스성경>으로 그 누구보다도 열심히 공부하여 성경에 관한 올바른 지식을 갖추어야 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그 누구에게라도 성경을 설교하고 가르칠 수 있어야 한다. 설교자는 마땅히 성경과 함께 사는 사람이어야 한다. 성경에 무지한 설교자는 있을 수 없다! 교회들이 영적으로 황폐해진 원인은 성경을 공부하지 않는 목사들 때문이다. 무지한 목사들이 무지한 교인들을 낳는다! 그들은 정규 신학교를 졸업한 후 목사고시에 합격하면 목사가 되어 강단에서 설교하고 가르칠 수 있다고 착각한다. 이 나라에는 매년 신학교를 졸업하는 목사 후보생이 적게는 7천 명에서 많게는 1만 명에 이르고, 현재 14만 명 이상의 목사들이 기독교계에서 활동하고 있지만, 그들의 “성경 지식”은 “빵점”이다. 이유가 무엇인가? 첫째, 하나님께서 영감으로 기록하시고 섭리로 보존하신 <한글킹제임스성경>을 무시했기 때문이고, 둘째, 『네가 진리의 말씀을 올바로 나누어 자신이 하나님 앞에 부끄럽지 않은 일꾼으로 인정받도록 공부하라.』(딤후 2:15)라는 명령을 무시했기 때문이다.
로마카톨릭에 항거했다는 자부심 속에서 종교 개혁자들의 후예들로 자처하는 개신교회 목사들은 루터나 쯔빙글리, 칼빈 등의 종교 개혁자들이 지녔던 지식에서 단 한 걸음도 전진하지 못했다. 심지어 그들이 가르쳤던 지식이 모두 올바른 것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들 무지한 목사들은 그들의 “잘못된 지식”까지도 성경으로 확인해 보지 않은 채 그대로 답습했다. 말하자면 종교 개혁이 일어났던 1500년대의 지식수준에 그대로 머물러 있으면서 계속 우려먹고 있는 것이다. 1620년경 메이플라워호를 타고 미국으로 건너온 “필그림 파더스” 중에 한 사람인 로빈슨 목사는 이런 비극적 현실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나는 개혁교회들의 실상에 대해 비탄을 금할 수 없다. 루터파들은 루터가 깨달은 것 이상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있으며, 칼빈주의자들 역시 칼빈이 남겨 놓은 것들을 붙들기에 급급하다. 물론 루터와 칼빈은 당대에 반짝이는 귀중한 별들이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모든 뜻을 다 보여 주신 것은 아니었다. 주님께는 그분의 거룩한 말씀으로 비춰 주실 진리와 빛이 여전히 많이 남아 있는 것이다.” 소위 근본주의자로 자처하는 목사들도 1900년대 초반에 사역했던 C.I. 스코필드나 클라렌스 라킨이 깨달은 지식 그 이상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있다. 이들은 계속 100년 전의 지식수준에서 제자리걸음만 하고 있는 것이다. 이들의 지식수준을 뛰어넘은 사람이 바로 피터 럭크만 목사이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잘 다스리는 장로[목사, 감독]들을 배나 존경할 사람으로 여기되 특별히 말씀과 교리에 수고하는 이들에게 그리할지니라.』(딤전 5:17)라고 권면했다.
그리스도인의 본업은 “복음과 진리를 전파하는 것”이어야 하고, 그리스도인의 전공과목은 “성경”이 되어야 한다. 성경을 공부하는 것은 “하나님의 명령”으로서 선택 사항이 아니라 반드시 해야 할 그리스도인의 의무이다. 설교자는 두말할 것도 없다! 설교자이면서도 성경을 공부하지 않고 있다면, 그것은 설교자의 기본 의무를 저버리는 행동일 뿐 아니라 하나님의 명령에 불순종하는 죄가 된다. 성경을 공부하지 않는 설교자는 게으른 자요, 인생을 낭비하는 자요, 열매 없는 자이다(벧후 1:8, 잠 18:9). 그런 설교자에게는 죄와 거짓 교리로부터 교회를 지킬 힘이 없다. 마귀의 세력과 싸워 이길 수 있는 능력도 없다. 왜냐하면 그렇게 할 수 있는 영적인 힘이 성경적 지식에서 나오기 때문이다(잠 24:5). 당신이 따르는 목사는 성경을 열심히 공부하는가? 성경에 관한 한 어떤 것을 질문하더라도 성경을 펼쳐서 구절과 구절을 비교하여 정확하게 답변해 주고 있는가? 교단 교리나 소위 유명한 목사들과 학자들의 주석으로 우물쭈물하고 있다면 그는 자격 없는 설교자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3.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개인적인 지식과 경험 속에서 주님을 첫째로 사랑해야 한다. 바울은 다른 모든 것을 손실과 배설물로 여길 만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가장 고상한 지식을 갖고 있었고(빌 3:7,8), 주님의 부활의 능력과 고난의 교제를 몸소 경험한(빌 3:10,11) 진정한 설교자였다. 그의 인생 최고의 목표와 열정은 예수 그리스도를 높여 드리는 것이었고(빌 1:20), 오직 주님만을 위해 사는 것이었는데(고후 5:15), 이는 “그리스도의 사랑”이 그의 마음을 강권했기 때문이다(고후 5:14). 주님의 강권하는 사랑은 그분의 십자가로 나아오는 죄인들을 구원할 뿐 아니라, 이미 구원받은 성도들을 강력하게 지배하는 힘과 능력이 된다. 죄인들을 암흑으로부터 광명으로 인도함으로써 세상 사람들을 정복하는 힘은 인간의 힘이나 권력이 아니고 바로 “그리스도의 사랑”이다. 그 위대한 사랑 앞에 흉악한 범죄자들도 무릎 꿇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항상 그리스도의 강권하시는 사랑으로 붙들려 있어야 하고 주님만을 첫째로 사랑해야 한다. 이것이 바로 설교자의 사역의 동기이자, 인생을 살아가는 이유가 되어야 한다.
예수님을 부인함으로써 제자의 직분을 상실했던 베드로를 다시 회복시키실 때, 예수님께서 그에게 물으신 첫 번째 질문은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였다. 베드로가 그 질문에 올바르게 반응했을 때,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양들을 먹이는 임무”를 맡기셨다. 섬김의 동기는 주님을 향한 사랑이어야 하지 단순한 의무가 되어서는 안 된다. 의무감으로 설교하는 것이 어떤 면에서는 필요하지만 온전한 동기는 되지 못한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만이 그 동기가 될 때, 그가 전파하는 설교는 다른 어떤 설교보다도 위대한 힘과 가치를 지닐 수 있다.
4.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사람이 아닌 하나님만을 신뢰해야 한다. 사람들을 의식하여 그들로부터 도움을 받으려 하는 순간 “사람들의 종”이 되고 만다. 설교자는 하나님께서 부르신 하나님의 종이다. 하나님의 종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존재로서 하나님으로부터 모든 필요를 공급받아야 한다. 그래서 설교자는 “기도의 사람”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전능하신 하나님의 능력에 의존하기보다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인간의 도움을 먼저 구하러 가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세우신 설교자가 아니다.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적용되겠지만, 특히 설교자는 기도하지 않고서는 한시도 살아갈 수 없고, 주님을 바라보지 않고서는 한시도 그에게 맡겨진 교회의 양 무리와 사역을 감당해 낼 수 없다. 존 넬슨은 말하기를 “매일매일 두세 시간씩 진지하게 기도하면 반드시 위대한 역사가 일어나고 만다.”라고 말했다. 기도하는 사람은 결코 침몰하지 않는다. 이 세상에서 기도하는 사람을 이길 수 있는 것은 없다. 이런 사실을 자신이 섬기는 교회의 담임목사로부터 배울 수 없다면 그 목사는 가짜이다!
5. 인생의 가치관이 바르게 정립되어 있어야 한다. 즉 “돈”과 관련된 육신의 정욕, “쾌락” 및 “여자”와 연관된 안목의 정욕, “명예”와 관련된 생의 자랑, 이 세 가지 문제를 하나님 앞에서 온전히 해결했다고 진솔하게 고백할 수 있어야 한다. 이런 “세상의 정욕들”에 연연하면 반드시 사역에 실패하게 된다. 세상과 교회 사이를 왔다 갔다 하는 설교자를 하나님께서 어떻게 쓰실 수 있겠는가? 특히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설교, 곧 회중의 양심을 강력하게 찌를 수 있는 설교를 할 수 없다. 타락한 설교자는 타락한 성도들이나 구원받지 못한 죄인들을 책망하는 메시지를 전파할 수 없다. 사실 이런 설교자는 겁이 많고 소심하며 몸을 사리는 자이고, 자신과 쾌락을 사랑하여 자신의 죄를 숨길 곳을 찾는 자이다. 그래서 이 나라 목사들이 강단에서 “싸구려 설교”나 하면서 돈을 벌고 있는 것이다. “동병상련”(同病相憐)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6. 겸손해야 한다. 결코 자기를 자랑하는 설교자가 되어서는 안 된다. 그리스도인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주님의 영광을 위해서만 사역해야 하는데, 자기 자랑은 영광을 자기에게 돌리는 것이고, 그것은 곧 자신이 겸손하지 못했음을 드러내는 행위이다. 술에 취한 사람들은 영웅 심리가 발동해서 자기 자랑을 늘어놓느라 떠들썩하다. 누가 쳐다보든지 개의치 않고 시끄럽게 떠드는 것이다. 그러나 성령으로 충만한 설교자는 자신의 육신을 죽이고 오직 주님만을 자랑하게 된다. 『모든 성도들 가운데서 가장 작은 자보다도 더 작은 나에게 이 은혜를 주신 것은 이방인들 가운데 헤아릴 수 없는 그리스도의 풍요함을 전파하게 하려는 것이라』(엡 3:8).
7. 혼들을 사랑하는 사람으로서 구령의 열정을 지녀야 한다. 어느 누구를 만나든지 그를 하나님께로 이겨올(구령, Soul Winning) 생각을 해야 하지 교회로 데려올 생각부터 하면 안 된다.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이 말하기 마련인데, 예수 그리스도로 꽉 찬 설교자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증거할 것이지만, 머릿속이 돈으로 꽉 차 있는 설교자는 긍정적인 사고방식, 오중복음, 삼중축복, 신유, 방언, 새벽 기도 등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교회로 꾀어 와서 “돈다발”을 바치게 만들 것이다!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나 “추수할 곡식이 하얗게 익어 있는 밭”(요 4:35)에 대한 환상을 지녀야 한다. 하나님의 일꾼으로서 복음 전파의 시급한 현실을 직시하고 살아야 하는 것이다. 피터 럭크만 목사는 “지옥으로 향하는 죄인들에 대한 환상을 잃어버린 성도는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다.”라고 말했다. 지금은 그 어느 때보다도 추수할 일꾼이 턱없이 부족하다. “참되고 유능한 하나님의 설교자”가 절실히 요청되는 시대이다! 자격 있는 설교자를 주시라고 하나님께 기도할 뿐 아니라, 우리 각자가 그런 일꾼이 될 수 있도록 준비해야 한다. 다른 성도들은 추수의 현장에서 땀 흘려 일하고 치열한 영적 전장에서 피 흘리기까지 싸우고 있는데도, 그저 바라보고만 있는 성도는 그리스도의 일꾼이나 동역자, 전우 또는 제자라 불릴 자격이 없는 것이다! B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