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진리의 말씀을 올바로 나누어 자신이 하나님 앞에 부끄럽지 않은 일꾼으로 인정받도록 공부하라(딤후 2:15).
신학논단 분류

피 없이 드려지는 헛된 경배

컨텐츠 정보

본문

성경대로믿는사람들 <2020년 08월호>

필자가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구속받고 성령 하나님을 통해 영이 거듭났을 때, 가장 먼저 들었던 생각은 “성경을 읽어야겠다”는 것과 “경배드릴 교회를 찾아야겠다”는 것이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서 새 생명을 얻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 “두 가지”를 적극적으로 찾아 나서야 한다는 생각을 하기 마련이다. 당시는 <한글킹제임스성경>이 출간되기 전이었으므로 개역성경이나마 구입해서 읽기 시작했고, 군대에서 근무하며 짬짬이 시간을 내어 열심히 읽은 탓에 다섯 달 만에 신구약 66권을 모두 읽을 수 있었다. 또한 경배가 무엇인지 알지 못하는 영적 어린 아기였지만, 날 구원해 주신 하나님께 경배를 드려야 한다는 단순한 의무감 속에서 교회에 꾸준히 출석했던 기억이 있다.

성경 읽기와 경배는 거듭난 성도에게는 자연스러운 의무이어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을 소홀히 대하고 경배를 우습게 여기는 사람을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구속받은 성도라고 말할 수 없다. 그리스도의 피에 관한 진리가 신구약성경 전체에 흐르고 있으며, 그 피로 구속받은 성도가 영과 진리로 드리는 경배를 하나님께서 기뻐하신다고 성경이 말씀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참된 경배자들이 아버지께 영과 진리로 경배드릴 때가 오나니 바로 지금이라. 이는 아버지께서 자기에게 경배드리는 그런 자들을 찾으심이니라. 하나님은 한 영이시니 그분께 경배드리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경배드려야만 하리라』(요 4:23,24). 개역성경은 『하나님은 한 영이시니』를 “하나님은 영이시니”로 변개시킴으로써 하나님을 추상적인 존재로 전락시켰지만, 바른 성경은 하나님을 『한 영』(a Spirit)이라고 기록함으로써 구체적으로 실존하는 신으로 계시하고 있다. 변개된 성경을 사용하는 자들은 추상적인 『알지 못하는 신』(행 17:23)에게 경배하는 반면, 성경대로 믿는 그리스도인들은 바른 말씀으로 『한 영』이신 하나님을 섬기기에 경배드리는 대상부터 그들과는 판이하게 다르다.


『한 영』이신 하나님께서는 그분께서 구체적인 인격체이신 것처럼 경배 또한 어떻게 드려야 하는지 구체적으로 계시하셨다. 즉 “영과 진리로 경배드려야 한다”는 것이며, 또한 그런 “경배자들을 현재도 찾고 계신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영과 진리로 경배드린다는 것이 무슨 뜻인가?


첫째, “영으로 경배드린다”는 것은, 영이 거듭난(요 3:5-8) 성도가 성령님 안에서(롬 14:17) 성령님의 인도하심에 따라(롬 8:1,13,14) 경배한다는 뜻이다. 경배는, 영이 거듭나지 않은 자연인의 상태로는 드릴 수 없고, 또한 하나님께 받아들여지지도 않는다. 주님께서는 요한복음 4장에서 우물가의 사마리아 여인에게 영과 진리로 드리는 경배에 대해 말씀하시기에 전에, 이미 요한복음 3장에서 니코데모에게 영의 거듭남에 대해 말씀하셨다. 그때 주님께서는 『내가 너에게 ‘너희는 거듭나야만 한다.’고 말한 것을 이상히 여기지 말라.』(요 3:7)라고 하셨는데, 말하자면 죄인의 죽은 영이 거듭나는 것은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며, 영이 거듭난 사람이 영으로 경배드리는 것 또한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닌 것이다. 영으로 거듭난 사람의 경배만 받아 주신다는 진리를 이상히 여기는 사람은 영이 거듭나지 않은 죄인임을 알아야 한다. 그 사람은 성도 안에 내주하시는 성령 안에서 그 성령님의 인도하심에 따라 경배드리는 것이 불가능하기에 지금까지 헛된 경배를 드려 온 것이다.
둘째, “진리로 경배드린다”는 것은, “진리의 말씀”에 근거하여 경배한다는 뜻이다. 그런데 말씀은 “영”이다.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전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한 말들은 영이요, 생명이라』(요 6:63). 이 구절에서 말씀하는 “영”은 인간의 영이나 성령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신 “말씀”을 가리킨다. 다시 말해 예수 그리스도에 관해 기록된 『진리의 성경』(단 10:21)을 근거로 그 말씀 앞에 마음의 생각과 의도를 순수하게 드러낸 상태에서(히 4:12) 드리는 경배가 진리로 드리는 경배요, 또 영으로 드리는 경배인 것이다.


정리하자면 영과 진리로 경배를 드린다고 할 때, “성도의 거듭난 영”과 “영이신 성령님”과 “영인 하나님의 말씀”(바른 말씀), 이상 삼박자가 딱 맞아야 비로소 하나님께 받아들여지는 경배, 곧 그분께서 찾으시는 경배가 되는 것이다. 오늘날 이와 같은 경배를 드리는 교회가 어디에 있는가? 영이 거듭난 성도들로 채워지고, 그들 안에 성령님께서 영원히 내주하시며,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목사를 통해 변개되지 않은 바른 말씀을 근거로 설교하는 교회가 어디에 있는가? 교인 수 1,000만 명을 자랑하고, 83,000여 개의 교회들이 플라스틱 십자가에 불을 켜서 한반도의 밤을 밝히는 한국 교회가 영과 진리로 경배드리는 교회인 것인가? 성경을 아는 사람이라면 누가 그런 말을 믿겠는가? 구원의 확신도 없는 교인들을 교단 교회들 안에 모아 놓고 변개된 성경을 펼쳐 들고 교회 놀이나 하는 그들은 분파를 만드는 자들이요, 성령이 없는 자들에 불과하다(유 1:19). 자신들의 모습을 똑바로 직시해야 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한 영이시며, 영과 진리로 “경배”드리는 자들을 찾고 계신다. 성경에서 “경배”라는 단어가 처음 등장하는 곳은 창세기 22장에서 아브라함이 독자 이삭을 하나님께 바치러 갈 때이다. 『아브라함이 그의 청년들에게 말하기를 “너희는 나귀와 함께 여기에서 머물라. 나와 아이는 저기로 가서 경배드리고, 다시 너희에게로 돌아오리라.” 하고』(창 22:5). 아브라함이 말한 경배는 독자 이삭을 제물로 바치는 “피 흘림”이 수반되는 경배였다. 결과적으로는 하나님께서 막으셨지만, 막지 않으셨다면 분명 이삭은 피 흘리는 제물로 바쳐졌을 것이다. 아브라함은 이것을 가리켜 “경배”라고 불렀던 것이다.


이처럼 한 영이신 하나님께 드리는 경배에는 반드시 “피”가 수반된다. 아벨이 하나님께 받아들여졌던 것은 그가 “양의 피”를 근거로 나아갔기 때문이며, 카인이 거부당한 것은 피 없는 육신의 열매로 나아갔기 때문이다. B.C. 4004년 이후로 세상에 존재해 온 모든 종교는 “아벨의 종교”와 “카인의 종교”로만 나뉜다. “아벨의 종교”는 그가 예표하는바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근거로 하나님께 나아가는 성경대로 믿는 기독교 신앙을 말하는데, 이 종교는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라고 말씀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피의 공로에 근거해서 하나님께 나아간다. 『그때 예수께서 그 식초를 받으시고 말씀하시기를 “다 이루었다.”고 하시더니 고개를 떨구시고 숨을 거두시더라』(요 19:30). 예수 그리스도께서 단번에 이루어 놓으신 영원한 속죄제에(히 10:9-12) 근거하지 않고 인간의 행위와 사상을 바탕으로 고안된 종교들은 모두 “카인의 종교”이다. 하늘의 여왕 마리아를 섬기는 로마카톨릭, 참선을 통한 깨달음으로 구원받는다는 불교, 간질병에 걸린 성도착자의 입에서 나온 쓰레기를 믿는 이슬람교, 자기 가족 하나 먹여 살리지 못한 술고래 게으름뱅이 유대인 칼 마르크스의 머리에서 나온 공산주의, 심지어 사회 복음으로 세상과 야합한 개신교회들까지 모두 다 하나님께 인정받지 못하는 “피 없는 카인의 종교들”인 것이다.


오늘날 배교한 교회들의 강단을 차지하고 있는 사회 복음은 19세기 후반에 사회 개혁에 의해 구원받으려 하는 자들이 미국에서 일으킨 운동이다. 개인의 구원이 아닌 사회의 구원에 초점을 맞추고 있으며, 사회적 정의와 범죄, 빈곤, 아동 노동 착취, 노동자의 처우 개선, 전쟁 등 사회적인 주제들에 대해 기독교적으로 접근한 비성경적인 교회 운동인 것이다. 사회악과 그 부조리의 척결을 주요 주제로 삼고 있는 그들은 현 세상의 인류 문제가 아담의 타락으로 인한 죄의 저주에서 기인된 것이 아니라 주변의 잘못된 환경과 사회의 구조적인 모순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봄으로써 사회 환경 개선과 정치 개혁을 통한 사회 구원을 목표로 삼고 있다.


그들의 문제는 무엇인가? 인류가 겪고 있는 고통의 근본적인 원인과 십자가의 의미를 전혀 모르고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죄를 지은 아담에게 선언하시기를 『네가 네 아내의 음성에 경청한 까닭에, 내가 네게 명하여 말하기를 ‘너는 그것을 먹지 말라.’고 한 그 나무의 열매를 먹었으니, 너로 인하여 땅은 저주를 받고 너는 너의 전 생애 동안 고통 중에서 그 소산을 먹으리라. 또 땅은 네게 가시나무와 엉겅퀴를 낼 것이요 너는 들의 채소를 먹을 것이며, 네가 땅으로 돌아갈 때까지 네 얼굴에 땀을 흘려야 빵을 먹으리니, 이는 네가 땅에서 취해졌음이라. 너는 흙이니 너는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창 3:17-19)라고 말씀하셨다. 인류가 겪는 고통의 원인은 한 사람 아담의 범죄로 인해 들어온 죄 때문이었다. 그 한 사람으로 인해 죄가 세상으로 들어오고 그 죄에 의하여 사망이 왔으니, 그리하여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전달되었다는 것이(롬 5:12) 성경의 선언이며, 죽음과 그 죽음을 두려워하며 겪어야 할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바로 이 저주를 해결하시려고 구주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죄의 저주를 상징하는 “가시관”을 쓰시고 십자가에서 인류의 죄를 제거하신 것이다. 『보라, 세상 죄를 제거하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라.』(요 1:29)라는 침례인 요한의 선언은 바로 그 점을 알려 주는 계시였다. 십자가에서 피 흘려 죽으시고 장사된 지 사흘 만에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사도행전 1장에서 셋째 하늘로 올라가신 이후 현 교회 시대에 대제사장으로 계시면서 하나님과 죄인들 사이의 화해를 위해 우리 그리스도인들을 복음 전파자로 내보내고 계신다(고후 5:18-20). 이 교회 시대에는 십자가의 복음을 듣고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고 영접해야 그분의 피로 죄 씻음을 받아 영이 거듭나고 혼이 지옥의 형벌에서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교회라면 당연히 이 피의 복음을 전파해야 하고, 반드시 이 피를 통해 경배로 나아가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피를 믿는 믿음을 통하여 그를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 가운데서 이전에 지은 죄들을 사하심으로 인하여 그의 의를 선포하려 하심이요』(롬 3:25).


배교한 교회들에서는 십자가의 피가 흐르는 복음을 무시하고 메마른 사막 같은 사회 복음이 전파되고 있다. “피 없는 경배”가 드려지고 있는 것이다. 누가 그런 경배를 받는 것인가? “마귀”이다. 광야에서 겁도 없이 하나님의 아들께 경배를 요구한 마귀가 그들의 경배를 받고 있는 것이다! 교회들이 사회적인 현안들에 관여하고 정치 개혁에 동참해야 한다는 주장들은 십자가의 피와는 전혀 무관하다. 예수님께서는 그런 썩어 빠진 일들이나 하라고 피 흘려 죽으신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존재를 부인하는 자유주의자들이 주장하는 사회 복음에 세뇌된 교회들의 강단은 황폐화된 지 오래되었고, 교인들의 시선은 세상을 향해 있다. 사회적 약자들의 문제, 노동조합 결성, 반정부 시위 같은 것들은 세상 시민 단체들이나 하는 일이 아니던가? 그나마 사후의 생을 의식하여 구원을 받기 위해 교회들을 찾아간 사람들도 십자가의 피의 복음을 듣지 못한 채 교회들을 떠나고 말았다. 세상에서 들을 수 있는 것을 굳이 교회까지 가서 들을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마지막 때의 교회들은 “카인의 교회들”이다. 그들은 경배를 드린다고 하지만, 실은 육신의 열매로 하나님을 불쾌하게 해 드리고 있을 뿐이다. 성경은 우리에게 카인과 같이 되지 말라고 경고하신다. 『카인같이 되지 말라. 그는 그 악한 자로부터 나왔으며 자기 아우를 살해하였으니, 무슨 연고로 그를 죽였겠느냐? 이는 그 자신의 행위는 악하고 그 아우의 행위는 의로웠기 때문이라』(요일 3:12). 카인이 아벨을 죽인 것은 아벨의 제물만 하나님께 받아들여진 것을 시기했기 때문인데, 이러한 카인에 관한 경고는 피를 근거로 하나님께 나아가는 아벨의 종교를, 육신의 행위를 근거로 나아가는 카인의 종교가 박해할 것임을 보여 준다. 즉 『카인의 길』(유 1:11)은 “종교적 살인자”의 길인 것이다. “카인”은 마호메트와 교황처럼 종교적 살인자였고, 공산주의를 신봉하는 자들처럼 종교적 살인자였으며, “불신”을 하나님으로 숭앙하는 불신자들처럼 종교적 살인자였다. 아벨은 그런 카인에게 살해당했지만 여전히 믿음으로 이렇게 말하고 있다. 『믿음으로 아벨은 카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써 의로운 자라고 증거를 받았으니, 하나님께서 그의 예물들을 인정하심이라. 그가 죽었으나 믿음으로 아직 말하고 있느니라』(히 11:4). 하나님께서는 아벨처럼 믿음으로 드리는 경배를 좋아하신다. 아벨은 당시의 사회적 상황과는 무관하게 짐승의 피를 통해 하나님께 나아갔다. 즉 하나님께서 계시하신 것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그의 부모에게 계시된 방식대로(창 3:21) 하나님께 경배해야 한다는 점을 확신하고 올바른 경배로 나아갔던 것이다.


믿음은 하나님께서 계시하신 것을 행함으로써 입증된다(약 2:18). 하지만 그럴 믿음이 없는 자들은 강단에 서서 예수 그리스도의 피와 무관한 이야기로 회중을 오염시키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그분께서 택하신 이스라엘 백성에게서 경배를 받으시려고 광야에 성막을 세우셨는데, 그 성막의 경배에서는 짐승의 피가 흘려졌다. 그 뒤 솔로몬의 성전에서도 주님께서는 경배를 받으시기 위해 짐승의 피가 흘려지게 하셨다. 왜 그러셨을까? 『이는 육체의 생명이 피에 있음이라. 내가 그것을 너희에게 주어, 제단 위에서 너희 혼들을 속죄케 하였나니, 이는 혼을 속죄케 하는 것이 피이기 때문이라』(레 17:11). 구약에서 죄인들은 스스로 하나님께 나아갈 자격이 없었기에 짐승의 피로 자기 생명을 대신해서 나아가야 했다. 모든 경배에서 “피”가 요구되고 있는 것이다! 신약 교회 시대에는 갈보리 십자가에서 구속 사역을 완성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근거로 경배해야 한다. 시대상이 변해도 복음은 변하지 않는다. 교회 시대의 복음은 십자가의 복음뿐이다. 그렇지 않은 모든 것은 카인의 종교요, 종교적 살인자의 길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BB

전체 938 / 14 페이지
RSS
번호
제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