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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어짐”이 아니라 “믿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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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대로믿는사람들 <2020년 06월호>
『이 복음 안에는 믿음에서 믿음에 이르게 하는 하나님의 의가 계시되었으니 기록된 바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롬 1:17).“요나가 고래에게 삼켜졌다.”라는 문장은 “고래가 요나를 삼켰다.”라는 문장과 어떻게 다른가? “앞 문장”은 뒤 문장과 비교해 볼 때 같은 의미를 가지고 있지만, 관심의 초점이 요나에게 가도록 하기 위해 요나를 “주어”로 놓고 “삼켜졌다”라는 “피동”의 표현을 사용했다는 차이가 있다. “피동”은 이렇게 행위의 대상을 강조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성경에서는 피동의 표현이 흔하게 사용된다. 『이 장막 집에 있는 우리가 짐을 지고 신음하는 것은 벗으려는 것이 아니라 옷입혀지고자 함이니 이는 죽을 것이 생명에 의해서 삼켜지는 것이라.』(고후 5:4)라는 말씀도 “옷입혀지다”나 “삼켜지다”라는 피동의 표현의 장점이 적절히 사용된 예이다.
한편 이러한 장점에도 불구하고 “피동”의 표현을 잘못 사용하면 매우 어색해지거나 아예 의미가 달라지는 경우도 있는데, 그중 하나가 바로 “믿어지다”라는 표현이다. 이 말은 “믿는 마음이 (내 의지와 상관없이) 자연스럽게 생겨나다”라는 의미로 사용된다. 그러므로 이 표현을 하나님과 성경에 대한 믿음에 적용할 때는 매우 조심할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믿어지다”라는 말이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믿다”라는 말과는 아주 다른 의미로 사용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말씀이 나에게 믿어지지 않는다.”라는 문장은 “나는 이 말씀을 믿지 않는다.”라는 문장과 전혀 다른 의미로 사용되는 것이다.
거리, 광장, 공원 등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장소에 나가서 거리설교를 하고 구원의 복음을 전파하다 보면, “잘 믿어지지 않는다”라는 말이나 “믿기지가 않는다”라는 말을 종종 듣는다. 우리는 우리가 전한 말씀을 “의지를 가지고 마음으로 받아들이라.”라고 전했는데, 그 말씀을 들은 그 사람들은 “믿는 마음이 억지로 생기지 않으니 못 받아들이겠다.”라고 말한다. 우리는 “능동적인 믿음”을 전하는데, 그들은 “피동적인 믿어짐”을 말한다. 즉 “믿어지지 않는다”라는 피동의 표현을 씀으로써 “믿기 싫다”라는 “자기 의지”를 우회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이처럼 “믿어지지 않는다”라는 말을 사용하는 사람들의 마음속에 있는 종교나 신앙에 관한 논리는 무엇인가? “거부감 없이 자연스럽게 당연한 듯이 생각되어야 믿을 만한 것이고, 자연스럽게 믿어지지 않는 것을 억지로 믿어 보려고 애써 봐야 결국 믿지 못하게 된다.”라는 심산이다. 그들의 생각 속에 확고하게 자리 잡은 이 “피동성”은 적극적인 의지를 가지고 수용할 의사가 없다는 철저한 무신론적 사고의 우회적 표현이다. “결단코 믿지 않겠다”라는 확고한 의지를 갖고 있는 것이다.
“믿어지지 않는다”라는 말이 가진 “피동성”의 함정에 주의를 기울인다면, “믿어진다”는 고백을 하는 사람들의 그 “믿음”도 과연 올바른 믿음인지 의심할 수밖에 없는데 이와 관련하여 다음의 몇 가지 사실들을 점검해 보자.
첫째로, 그는 자신의 “구원”을 확신할 수 없다. 성경적인 구원은 정확하게 자신이 죄인인 것을 인정하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죄를 위해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고부활하신 사실을 분명하게 받아들일 때 이루어진다(롬 10:9,10). 그런데 그가 그냥 뭉뚱그려서 “믿어진다”라는 식의 생각을 가졌다면, 그는 필시 구원받지 못했으면서도 구원받았으려니 하고 추측하며 사는 사람일 것이다. 복음이 믿어져서 믿었다는 것은 안 믿어졌다면 못 믿었을 것이라는 말이 되기도 하는데, 그런 피동적인 자세는 “의지에 따른 믿음”을 발휘하여 적극적으로 영접하고 받아들이는 성경적인 구원과 다르다. “이제부터 믿겠습니다.”라는 표현은 구원받은 사람의 올바른 고백이지만, “이제부터 믿어집니다.”라는 말은 결코 구원받은 사람의 올바른 고백이 아니다.
둘째로, 그는 “구원의 영원한 보장”을 확신할 수 없다. 성경은 믿음으로 구원받은 성도들의 구원을 영원히 보장하고 있다(고전 1:8, 롬 8:38,39, 요 10:29). 그런데 그 사람 안에 있는 “믿어짐”이 처음에 어떻게 생겨난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나중에 어떤 이유로 “믿어지지 않게 되면” 그의 “믿어짐”은 그의 의지와 상관없이 사라지게 된다. 게다가 그는 믿음을 유지하고자 하는 의지를 가지지 않고, 그저 계속 믿어지기만을 바라는 신앙생활을 해야 한다. 그러다 보니 스스로가 계속 믿어지도록 하기 위해 뭔가에 의존하려 하고, 형식적이고 종교적인 행위에 따른 신앙생활에 의존하면서 “믿음이 유지되고 있다”는 느낌만 계속 추구하게 된다. 처음부터 “자기 의지”로 시작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 “믿어짐”을 유지하는 데 있어서 의지를 발휘할 여지조차 없는 것이다. 결국 피동적으로 발생한 믿어짐 위에 쌓은 무미건조한 신앙생활로 확신도 없는 구원 속에서 끊임없이 맴돌게 된다.
셋째로, 그는 “열정을 가지고” 복음을 전파할 수 없다. 성경은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딤후 4:2)라고 명령하신다. 그러나 믿어져서 믿었다고 하는 사람들은 자기 자신의 구원이나 구원의 영원한 보장을 확신할 수 없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에게전파할 의욕을 가지기가 힘들다. 하나님의 말씀이 그에게 그저 “믿어지는 것”이라면, 설혹 그가 의욕을 가지고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더라도 그는 그저 그 말씀이 다른 사람에게 믿어지기만을 기대할 수밖에 없다. 일단 복음을 전했는데 “안 믿어진다”고 하는 사람에게는 더 이상 할 얘기도 없다. “믿어지는” 사람 따로 있고 “안 믿어지는” 사람 따로 있다고 생각하는 것으로는 결코 복음 전파의 열정을 계속 유지할 수 없는 것이다.
넷째로, 그는 다른 사람의 믿음의 본을 “의지적으로” 따를 수 없다. 사도 바울은 『너희는 모두 나를 따르는 자가 되라.』(빌 3:17)라고 권면했다. 성경에 나오는 인물이든, 교회사에서 중요한 업적을 남긴 인물이든 그 인물이 발휘한 믿음의 역사는 대부분 하나님을 신뢰한 그들이 하나님을 향한능동적인 믿음을 행동으로 발휘한 것의 결과이지, 아무런 의지 없이 생겨난 “믿어짐”의 힘으로 이루어진 열매가 아니다. 의지가 결여된 믿어짐에는 아무런 힘도 있을 수 없다. 그의 믿어짐이 성경에 나오는 믿음의 용사들이 발휘한 것과 같은 적극적인 행동을 불러일으킬 수 없는 이유는 “믿어짐” 그 자체가 본래 “믿음”이 아니기 때문이다.
성경 말씀을 전파하면서 만난 “교회 다니는 사람들” 중에 자기가 성경의 원리를 꽤 안다고 하는 사람들도 있었는데, 그들 중에는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믿음”이 곧 “믿어짐”이라고 얘기하는 사람도 있었다. 조금 더 캐물으니 “칼빈주의 5대 강령”을 좀 공부했던 모양인데, 자기가 생각하는 “믿음”을 칼빈주의 교리에 억지로 끼워 맞춰 보려다가 믿음을 “믿어짐”으로 바꿔서 이해할 수밖에 없었던 모양이다. 그러나 웃고 넘길 일만은 아니다. 실제로 칼빈주의를 받아들이는 교회의 교인들 상당수가 “믿어짐”이라는 희한한 교리를 믿고 있는 것이 현실이기 때문이다.
“칼빈주의 5대 강령”이란, 인간이 완전히 타락했기 때문에 자신의 구원을 위해서 자신의 의지에 따른 믿음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할 수 없다는 “전적 타락,” 구원받을 사람과 구원받지 못할 사람이 미리 정해져 있다는 “무조건적인 선택,” 구원받기로 미리 정해진 사람들을 위해서만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흘려졌다는 “제한된 속죄,” 성령님께서 구원받기로 예정되어 있는 사람에게 임하시어 그 사람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그 사람을 구원하신다는 “저항할 수 없는 은혜,” 모든 구원받은 사람은 자신의 구원을 끝까지 견디며 유지해야 한다는 “성도의 견인,” 이상 다섯 가지 명제를 일컫는다. 이것은 깊이 고찰해 볼 것도 없이 상식적인 “믿음”의 원리를 뒤엎는 비성경적인 이론이라는 것을 그 용어들의 정의만 보더라도 알 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의지”를 인정하시고 그 의지에 따른 “결정”에 책임을 묻는 분이시다(마 23:37-39). 그런데 어떻게 한 개인의 구원이 미리 예정될 수 있단 말인가? 예정된 대로 살았는데 지옥에 가야 한단 말인가? 말도 되지 않는다.
이렇듯 비성경적인 교리인 칼빈주의 5대 강령을 공부한 사람들은 (아마도 장로교의 교수들이나 목사들일 터인데) 성경에 부합되지 않는 것을 억지로 받아들이고, 또 그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설명하려다 보니 “의지를 가지고 받아들임”을 의미하는 “믿음”을 “의지와 무관한 믿어짐”으로 대체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장로교의 교수들과 목사들은 그 “믿어짐”의 토대 위에 무엇을 쌓을 수 있는가? 아무것도 쌓을 수 없다. 필자는 예전에 “내가 아는 사람 중에 잘 믿는 것 같다가 안 믿는 사람을 봤는데, 나도 지금은 믿어지지만 나중에 안 믿어지면 지옥 가는 것 아닌가 걱정된다.”라고 말하는 사람을 본 적이 있다. 이런 걱정을 하는 사람이 그 사람 하나뿐이겠는가? 이것이 바로 장로교회들과 장로교회를 다니는 교인들의 현실인 것이다.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믿음”이 “믿어짐”과 동의어라면, “믿음”을 “믿어짐”으로 바꾸었을 때 말이 되어야 한다. 정말 그런지 확인해 보라. 『하나님께서는 그의 피를 믿는 믿음을 통하여 그를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롬 3:25).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흘리신 그 피를 믿는 믿음은 구원을 위한 매우 귀중한 믿음이다. 그런데 이 믿음을 “그의 피를 믿는 믿어짐”이라고 한다면 말이 되겠는가? 『형제들아, 이로 인하여 우리가 우리의 모든 환난과 궁핍 가운데서도 너희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위로를 받았노라』(살전 3:7). 사도 바울은 환난과 궁핍 가운데서도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위로를 받았다. 피동적인 “믿어짐”이 그에게 위로를 줄 수 있었겠는가? 『이 사람들이 모두 믿음을 통하여 좋은 평판을 얻었으나』(히 11:39). 믿음의 원로들은 능동적인 “믿음”으로 “좋은 평판”을 얻었다. 과연 자기 의지가 없는 “믿어짐”으로 “좋은 평판”의 대상이 될 수 있겠는가? “믿어짐”은 결코 “믿음”이 아니다!
“믿음”은 “자기 의지에 따라 그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을 뜻한다. 결코 “의지 없이 자연스럽게 믿어지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성경에서 말씀하신 믿음 중에서 “피동적인 믿어짐”을 의미하는 믿음은 단 하나도 없다. 찰스 스펄전은 “믿음이란 자신을 약속 위에 던지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믿음”은 이처럼 “의지”를 가진 능동적인 행동이다. 스펄전은 칼빈주의자였으나, “극단적 칼빈주의와 알미니안주의”를 반대한 온건한 칼빈주의자였다. 그는 “능동적인 믿음과 적극적인 믿음의 행위”를 설파한 “믿음”의 설교자였지, 피동적인 “믿어짐” 같은 것은 전한 적이 없다.
아직도 “믿어짐”에 의존하려 하는가? “믿어짐”이 “믿음”보다 자연스럽게 느껴지는가? 하나님을 믿고자 했는데 믿어지지 않는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자 했는데 믿어지지 않는가?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는가? 드와이트 무디도 “믿어지지 않는 것은 없다. 단지 믿기 싫은 것일 뿐이다.”라고 말했는데, 이것은 무신론자들의 정곡을 찌르는 말이다. 이제 “피동”적인 “믿어짐”의 논리에서 벗어나 적극적인 “믿음”으로 자신의 구원과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삶을 점검하고 올바른 진리의 말씀으로 나아가자. B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