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진리의 말씀을 올바로 나누어 자신이 하나님 앞에 부끄럽지 않은 일꾼으로 인정받도록 공부하라(딤후 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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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대로믿는사람들 <2024년 01월호>

조도희 / 부산성경침례교회 담임목사



초지일관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기를 강조하고 권면했던 사도 바울은 마음과 생각을 강조한 만큼이나 그 영적 전쟁의 승리의 비결이 “양심”에 달려 있음을 여러 차례에 걸쳐 말했다. 즉 “선한 양심”(행 23:1, 딤전 1:5,19), “하나님과 사람 앞에 항상 거리낌이 없는 양심”(행 24:16), “약한 양심”(고전 8:12), “순수한 양심”(딤전 3:9, 딤후 1:3), “화인맞은 양심”(딤전 4:2), “더럽혀진 양심”(딛 1:15), “악한 양심”(히 10:22)에 관해 말한 것이다. 성도가 하나님의 온전한 사람으로 살아가기 위해서는 온전한 믿음을 유지하는 올바른 양심을 가져야 한다. 양심을 하나님께서 중요하게 다루시는 만큼이나 마귀도 사람의 양심을 변질시켜서 인생을 아무 유익도 없는 일에 낭비하게 만든다는 점을 알아야 하는 것이다.


양심은 죄를 증거하여 하나님을 인식하게 한다. 『그들의 양심도 증거하고 그들의 이성이 송사하거나 서로 변명하여 그들의 마음에 기록된 율법의 행위를 보여 주느니라』(롬 2:15). 첫 번째 사람의 불순종으로 인하여 인간은 선과 악, 즉 알려진 하나님의 뜻에 대한 순종이라는 선과 불순종이라는 악에 대한 지식을 경험을 통해 직접 알게 되었다(창 3:10). 요셉을 팔았던 형들의 양심은 자신들의 죄를 돌아보게 하였다(창 42:21). 예수님을 공격할 목적으로 간음한 여인을 붙잡아 온 사람들이 죄인임을 알게 한 것은 그들 각자의 양심이었다. 『그 말을 들은 자들은 양심에 가책을 받아 가장 늙은 자로부터 시작하여 맨 나중 사람까지 하나씩 하나씩 자리를 뜨더라』(요 8:9).

구원은 성령의 역사로 죄인의 양심이 하나님을 의식할 때 이루어진다. 성령의 역사가 없는 양심의 반응은 후회만을 낳는다. 하나님의 마음에 맞는 사람으로 불린 다윗은 늘 하나님을 의식하고 있었기에 사울의 옷자락을 벤 것으로 인하여 양심에 가책을 받아 하나님의 역사하심에 걸림돌이 되지 않았다(삼상 24:5). 그러나 부당하게 다윗을 죽이려는 자신의 잘못을 깨달은 사울은 동일하게 양심에 가책을 받아 심지어 소리 높여 울며 자신의 죄를 시인하였으나(삼상 24:16) 하나님을 의식하지 않은, 자신의 충동된 감정을 토로하는 데서 그쳤기에 비극적으로 생을 마쳤다. 주님을 배반한 유다 이스카리옷 역시 주님께서 정죄받으신 것을 보고 양심의 가책을 받아 스스로 후회하였는데 하나님을 의식하지 않은 후회였기에(마 27:3) 결국은 자살로 마감하였다. 성령께서 어떤 죄인에게 죄와 의와 심판에 대해 책망하실 때(요 16:8), 그 죄인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것이 죄라는 사실을 깨달아(요 16:9) 하나님의 의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구원을 받게 된다.


하나님께서는 살아 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하기 위해 제일 먼저 양심을 정결케 해 주셨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새로운 피조물은 하나님의 일인 선한 일을 행하게 하려고 창조되었는데, 선한 일이란 하나님을 섬기는 것을 말한다(엡 2:10). 이를 위해 모든 선한 일에 철저히 구비되게 할 목적으로 우리에게 “성경”을 주셨다(딤후 3:16,17). 구약의 짐승의 피로는 그것이 아무리 많이 반복적으로 흘려져도 육체만을 정결케 할 수 있었지만,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양심을 깨끗하게 해 주셨다. 『하물며 영원하신 성령을 통하여 흠 없는 자신을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죽은 행실에서 너희 양심을 정결케 하여 살아 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하지 못하겠느냐?』(히 9:14) 즉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을 믿을 때 양심이 정결케 되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의 훌륭한 군사로서 주님께서 맡겨 주신 믿음의 선한 싸움을 잘 싸우고 달려갈 길을 마치고 단번에 전해 주신 그 믿음을 잘 지켜야 하는데, 이 점은 그가 얼마나 정신을 차려서 순수한 양심과 선한 양심을 부지런히 지키느냐에 달려 있다. 하나님께서 쓰시는 하나님의 사람은 순수한 양심의 사람이고(딤전 3:9, 딤후 1:3), 선한 양심의 사람이다(히 13:18). 이 순수하고 선한 양심은 하나님의 말씀과 직접적으로 관련이 있다. 『이제, 계명의 목적은 순수한 마음과 선한 양심과 가식 없는 믿음에서 나오는 사랑이거늘』(딤전 1:5). 그리스도인이 선한 양심을 구비해야 하는 이유는 선한 양심을 가져야만 하나님의 선한 말씀들을 굳게 붙들고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울 수 있기 때문이다. 『아들 디모데야, 내가 너에게 부탁하노니, 전에 너에게 주어진 예언들을 따라 그것으로 선한 싸움을 싸우며』(딤전 1:18).


하나님 앞에 올바른 양심을 가지고 있는 사람의 특징들 가운데 하나는,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고 하나님만을 두려워하며 담대하게 산다는 것이다. 사도 바울은 로마 총독 펠릭스 앞에서 심문을 받을 때 자신을 변론하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 소망 때문에 나 자신도 하나님과 사람 앞에 항상 거리낌이 없는 양심을 지니려고 힘쓰나이다』(행 24:16). 바울이 이방 권세자를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 앞에 거리낌이 없는 양심을 지녔기 때문이었다. 부활의 소망을 지닌 하나님의 사람이 부활의 증인으로서 부활 자체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를 전할 때 하나님과 사람 앞에 거리낌이 없는 양심이 없다면 그 일이 가능하겠는가! 성경에서 그렇게 많이 “두려워 말라”고 말씀하시는 이유는 두려움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면 하나님의 일을 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양심이 잘못되면 하나님만을 두려워하지 못하고 사람을 두려워하는 겁쟁이가 된다. 겉으로는 객기에 가까운 모든 종류의 육신적 용기가 있어 보여도 실제로는 도덕적으로나 영적으로 전혀 용기가 없는 경우가 많다. 부당한 일을 행한 헤롯을 지속적으로 책망한 침례인 요한은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는 하나님의 사람이었던 반면, 그 요한을 죽인 헤롯은 요한이 선포한 진리에 대항한 결과 양심이 죽은 겁쟁이가 되었다. 그는 자신을 책망하는 요한을 두려워하여 그가 자기에게 행하라고 말한 많은 일을 행하였지만(막 6:20), 정작 바로잡아야 할 음행의 문제에 있어서는 바로잡을 용기가 없었던 것이다. 양심이 죽은 그는 하나님을 두려워할 수 없었기에 아내를 두려워했고, 사람들이 자신을 어떻게 생각할지를 두고 고뇌하면서 자신의 체면이 깎이는 문제에 대해서만 두려워했다(막 6:26).


마귀는 성도의 믿음이 형성되지 못하도록 공격하며, 그 공격은 양심을 공격하는 방식으로 다가온다. 마귀의 공격으로 일단 더럽혀진 양심은 하나님께 쓰임받지 못한다. 『정결한 사람들에게는 모든 것이 정결하나 더럽혀진 자들과 믿지 않는 자들에게는 아무것도 정결한 것이 없고, 도리어 그들의 마음과 양심이 다 더럽혀져 있느니라. 그들이 하나님을 안다고 고백하나 행위로는 부인하나니, 가증한 자요, 불순종하는 자요, 모든 선한 일에 버림받은 자들이라』(딛 1:15,16). 즉 양심이 더럽혀지면 고백은 있으나 실행으로 입증하지 못하는 자들이 된다. 그런 자들은 하나님의 일인 선한 일에 버림받은 자들이다(고전 9:27). 그런가 하면 진리의 지식에 이르지 못하고 마귀의 교리에 세뇌당하여 양심에 화인을 맞아도 하나님의 일을 할 수가 없다. 『이제 성령께서 분명히 말씀하시나니, 마지막 때에 어떤 자들이 믿음에서 떠나 미혹하는 영들과 마귀들의 교리들을 따르리라. 그들 자신의 양심이 화인을 맞아 위선으로 거짓을 말하리라』(딤전 4:1,2). 믿음에 대한 선한 양심을 내던지므로 파선한 사람들 가운데 후메내오와 필레토가 있는데 이 양심에 화인을 맞은 자들은 부활이 이미 이루어졌다는 거짓말을 하여 어떤 사람들의 믿음을 뒤엎어 버렸다(딤후 2:17,18). 이런 자들은 그들이 비록 거듭난 그리스도인이라 해도 하나님께는 아무런 쓸모도 없는 천한 그릇이 되고 만다(딤후 2:20).


누구나 양심이 잘못되어 하나님을 섬길 수 없는 상황에 처할 수 있다. 유대교를 섬겼던 바울은 그 자신의 무지한 양심으로 하나님의 피로 사신 교회를 박해했었다(행 26:9-11). 심지어 다윗 같은 사람도 한때 겁쟁이가 되어 필리스티아인 왕을 두려워하여 미친 척을 한 적이 있었다(삼상 21:12-14). 이세벨이라는 여자 한 사람의 위협이 무서워서 살기 위해 도망을 쳤던 사람은 그 이세벨을 추종했던 바알 선지자 450명을 죽인 바로 그 사람 엘리야였다. 안식일에 예수님께서 치유해 주신 소경의 부모는 바리새인들이 자신들을 유대교 회당에서 출회시킬까 봐서 예수님에 관해 증거하기를 두려워했다(요 9:22). 선한 양심, 정결한 양심, 순수한 양심, 그리고 거리낌이 없는 양심을 지키는 길은 하나님의 말씀에 자신의 양심을 묶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말씀을 통하여 성령 하나님의 조명 아래 명백한 그분의 뜻을 보여 주실 때 그 즉시로 빛 가운데 걸어가야 한다(요일 1:7). 비록 하나님께서 보여 주신 뜻에 “감동”을 받았다 해도 그 뜻에 “순종하지” 않는다면 당신의 양심은 즉각 “논쟁”에 들어가고, 그 결과 양심이 무뎌지고 변질되어서 더 이상 하나님을 섬길 수 없는 사람으로 전락하게 된다. 그리스도인은 이 점을 잊지 말아야 한다. B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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