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진리의 말씀을 올바로 나누어 자신이 하나님 앞에 부끄럽지 않은 일꾼으로 인정받도록 공부하라(딤후 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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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마음에 맞는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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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대로믿는사람들 <2020년 02월호>

사울과 다윗, 두 사람 모두 “기름부음을 받은 왕”이었으나, 사울은 자살로 생을 마감했고, 다윗은 하나님의 뜻을 행함으로써 온전히 쓰임을 받았다. 그 차이는 외모나 능력에 있지 않았고 “마음의 상태”에 있었다. 다시 말해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마음에 맞는 사람을 찾으셨던 것이다(삼상 13:14). 『내가 이새의 아들 다윗을 만나니 내 마음에 맞는 사람이라. 그가 나의 모든 뜻을 행하리라』(행 13:22).

그런데 간음죄를 저지르고 속이고 살인하였던 다윗이 어떻게 하나님의 마음에 맞는 사람으로 불릴 수 있었는가? 과연 하나님의 마음에 맞는 사람은 어떤 사람인가?

“하나님의 마음에 맞는” 사람은 “겸손한 종의 마음”을 지닌 사람이다. 본래 다윗은 유명한 사람도, 다른 사람의 이목을 끄는 사람도 아니었다. 그러나 홀로 있는 시간을 통해 하나님만을 의식하고 주님과 동행하는 훈련을 잘 받고 있었다. 그는 사람을 의식하지 않고 자신이 해야 할 일, 곧 아버지의 양들을 치는 일에 묵묵히 최선을 다했다. 심지어 그 일을 성공적으로 수행하기 위해서는 목숨을 걸고 사자나 곰과 맞서 싸워야 하는 경우도 있었다. 이렇듯 “종”은 철저하게 “주인”만을 의식하는 사람이다.

반면에 사울은 사람을 의식하여 “사람의 종”이 된 인물이었다. 그가 죄를 지은 동기도 사람들에 대한 의식에서 비롯되었다. 『내가 죄를 지었나이다. 내가 주의 계명과 당신의 말씀을 어겼으니, 이는 내가 백성을 두려워하고 그들의 음성에 복종하였음이니이다』(삼상 15:24). 이렇게 죄를 자백했을 때조차 사람을 의식하여 백성들 앞에서만큼은 자신을 존중해 달라고 간구하기도 했다. 『내가 죄를 지었나이다. 그러나 내가 당신께 청하오니, 내 백성의 장로들과 이스라엘 앞에서 나를 존중해 주시고 또 나와 함께 돌아가서 나로 주 당신의 하나님께 경배하게 하소서』(삼상 15:30). 사울이 다윗을 시기하여 죽이려 했던 동기도 사람을 의식한 결과였다(삼상 18:8). 심지어 죽을 때조차 사람을 의식하며 죽어 갔다(삼상 31:4,5).

어떤 사람에 대한 “이미지”는 주변 사람들에 의해 적지 않게 꾸며지고 조작되기도 한다. “진정한 종”은 보는 사람이 없을 때에도 눈가림으로 하지 않고 묵묵히 주인이 맡긴 그 일을 성실하게 행한다. 그런 가운데 주인을 향한 흔들리지 않는 충성심은 더욱 커져 간다. 그래서 다윗은 골리앗을 상대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사울 왕의 말에 다음과 같이 일갈했다. 『왕의 종이 사자와 곰도 죽였는데, 이 할례받지 않은 필리스티아인이 살아 계신 하나님의 군대를 모독하는 것을 보았으니 그도 그들 중 하나같이 되리이다』(삼상 17:36).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겸손한 종의 마음”을 지닌 사람을 찾으셔서 그분의 뜻을 수행하게 하신다. 다윗이 그의 아버지 이새가 맡긴 양 무리를 최선을 다해 잘 돌보았을 때, 하나님께서는 그의 신실함과 온전함을 보시고 이스라엘 백성이라는 하나님의 양 무리를 맡기셨다. “겸손한 종의 마음”을 지닌 다윗을 양 우리로부터 취하셔서 주의 유업인 이스라엘을 기르게 하신 것이다(시 78:71).

하나님께서 쓰시는 사람은 하나님의 마음에 맞는 사람인데, 곧 “권위에 순종하는 마음”을 지닌 사람이다. 하나님의 능력으로 골리앗을 죽이는 데 있어서 어떤 망설임도 없었던 다윗이 그를 죽이기에 혈안이 된 사울을 죽일 기회가 왔을 때는 상당히 주저했다. 다윗을 수행하는 측근들은 하나님께서 사울을 죽일 수 있도록 기회를 허락하신 날이라고 그의 마음을 충동했지만 그는 그들의 요구를 단호하게 물리쳤다. 『주의 기름부음 받은 이, 곧 나의 주인께 나의 손을 뻗쳐 그를 치려고 이런 일을 행하는 것은 주께서 금하신 것이라. 이는 그가 주의 기름부음 받은 자임이라』(삼상 24:6).

사실 적을 공격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왔고, 더욱이 주변 사람들이 모두 한마음으로 그렇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압박을 가할 때 그것을 거부하기란 결코 쉽지 않다. 거부할 경우 오히려 “겁쟁이”라는 비난도 들을 수 있다. 그러나 다윗은 사울의 옷자락을 벤 것만으로도 양심의 가책을 느꼈다(삼상 24:5).

몇 번이고 되짚어 봐도 잘못한 쪽은 분명 사울이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다윗에게 그 잘못한 일을 바로잡을 권리를 주시지 않았다. 그 일은 하나님께서 하실 일이었다. 이 사실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던 다윗은 이 문제를 전적으로 하나님께 맡겼다. 『주께서 나와 왕 사이를 판단하시고, 주께서 나를 위하여 왕에게 보복하시기를 원하나, 내 손으로는 왕을 해치지 아니하리이다... 그러므로 주께서 재판장이 되어 나와 왕 사이를 판단하시고 나의 사정을 옹호하시고 왕의 손에서 나를 구해 주시기를 원하나이다』(삼상 24:12,15). 다윗은 어떤 일이 있어도 하나님의 권위를 침범하지 않았던 것이다.

또한 하나님의 권위에 순종하는 사람은 모든 일에 있어서 “하나님의 섭리”를 인정한다. 다윗이 압살롬의 반역으로 예루살렘에서 빠져나와 쫓기고 있었을 때, 사울의 가문에 속한 “시므이”가 그에게 아주 심한 저주의 말을 하고 돌을 던졌다. 가장 약한 상태에 있는 사람에게 비열한 짓을 한 것이다. 이에 스루야의 아들 아비새가 왕을 저주한 시므이를 죽이겠다고 나서자, 다윗은 그 제안을 일축하고 모든 상황을 주님께 맡겼다. 『그를 내버려 두고 그로 저주하게 하라. 이는 주께서 그에게 명하셨음이니라. 주께서 혹시 나의 고난을 살펴보시고, 오늘의 그의 저주 때문에, 주께서 선으로 내게 갚아 주실까 하노라』(삼하 16:11,12).

사실상 시므이가 다윗을 향해 저주했던 말들은(삼하 16:8) 모두 거짓말이었다. 그는 압살롬의 반역과 관련하여 하나님께서 사울과 그 집안을 살해한 것에 대한 복수를 다윗에게 행하시는 것이라고 비난했는데 이는 사실과 달랐다. 왜냐하면 사울은 다윗의 손에 죽은 것이 아니라 자살하였고 그 아들들 역시 필리스티아인들과의 전쟁에서 죽었기 때문이다. 또한 다윗이 사울의 보좌를 찬탈하여 대신 왕이 된 것도 아니었는데, 그 보좌는 “하나님의 섭리적인 결정”에 의해 다윗에게 주어졌기 때문이다. 심지어 하나님께서 다윗의 보좌를 압살롬에게 넘기신 것도 아닌데, 이는 압살롬이 반역으로 그의 아버지의 보좌를 찬탈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이렇듯 하나님께서 세우신 왕을 거짓말로 저주하고 비난한 시므이는 죽어 마땅했으나, 다윗은 주님께서 그렇게 말하라고 하셨을지 모른다고 말하면서 그를 내버려 두라고 했다. 그러면서 그의 말이 옳을지도 모르는 일이며, 설령 틀리다 하더라도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때에 그분의 방법으로 해결해 주실 것이라고 말했다. 그야말로 가장 높은 수준의 태도로 반응을 보인 것이다.

사울이 버림받은 것은 그가 절대로 간섭해서는 안 되는 제사장직에 손을 댔기 때문이다(삼상 13:9). 권위에 대한 침범이었다! 유다 왕 웃시야도 주제넘게 주의 전으로 들어가 향단에 분향하려고 했을 때, 충성스런 제사장들이 왕을 가로막고 서서 『웃시야여, 주께 분향하는 것은 왕께 속한 일이 아니고 분향하기 위하여 성결케 한 아론의 자손인 제사장들에게 속한 일이니 성소에서 나가소서. 왕이 범죄하였사오니 그 일로 왕이 주 하나님으로부터 존귀를 얻지 못하리이다.』(대하 26:18)라고 말했다. 그러나 웃시야가 도리어 화를 내면서 강행했을 때, 하나님께서는 그를 문둥병으로 치셨다.

하나님께서 쓰시는 사람은 하나님의 권위에 순종하고 모든 일에 하나님의 섭리를 인정하는 사람이다. 따라서 삶의 문제가 생겼을 때, 우선 그것이 자신의 죄와 관련이 있는지 살펴보아야 한다(cf. 수 7:20). 이스라엘이 전염병으로 칠만 명이 죽은 것은 다윗 한 사람의 죄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가 죄를 진정으로 뉘우쳤을 때 재앙은 멈췄다(대상 21:17). 밧세바와의 간음으로 태어난 아이가 죽은 것은 그 아이의 죄 때문이 아니라 그 아이의 아버지의 죄 때문이었다. 다윗은 이 모든 일에 있어서 하나님의 섭리를 인정했다.

이 시대가 겪고 있는 어려움들의 주된 원인은 하나님께서 세우신 권위를 두려워하지 않는 데서 비롯된다. 이것은 일종의 “하나님을 모독하는 행위”이다. 이를테면 부모의 권위에 불순종하는 것은 하나님을 모독하는 것이다. 목자의 권위를 무시하는 것은 하나님을 모독하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순종”을 배우셔서 온전한 구원의 대장이 되셨듯이, 다윗도 하나님의 권위에 순종했을 때 이스라엘을 통치하는 왕의 권세로 통치할 수 있었고, 또한 하나님의 뜻을 수행할 수 있었다. 그야말로 하나님의 마음에 맞는 사람이었던 것이다.

“용서하는 마음”을 지닌 사람 역시 하나님의 마음에 맞는 사람으로서 주님께서 쓰시는 사람이다. 압살롬의 반역이 진압된 후 다윗이 예루살렘으로 돌아오기 위해 요단 강을 건너려 했을 때, 시므이와 베냐민 사람 천 명을 포함한 많은 사람들이 왕을 맞이하기 위해 모여들었다. 시므이는 다윗 앞에 나아와 겸손하게 엎드려 용서를 빌었다. 『내 주는 나에게 죄를 지우지 마시고, 내 주 왕께서 예루살렘에서 나가시던 날 왕의 종이 패역하게 행한 일을 기억하지 마시고, 왕께서는 그 일을 마음에 두지 마소서. 왕의 종이 스스로 죄를 지었음을 알기에, 보소서, 내가 오늘 요셉의 온 집에서 가장 먼저 나와, 내 주 왕을 맞이하러 내려왔나이다』(삼하 19:19,20).

시므이가 진실한 마음으로 용서를 빌었을 때, 다윗은 밧세바나 우리야와 관련하여 하늘의 하나님께 범죄한 일이 그리 오래된 일이 아니었기에 자신이 과거에 용서받은 사실을 기억했을 것이다. 그가 하나님 앞에 엎드려 죄를 자백했을 때(삼하 12:13) 주님께서는 값없이 용서하셨다. 죽어 마땅했던 그가 용서를 받아 죽지 않게 된 것이다. 이제 다윗은 그 “동일한 자비”를 자신에게 큰 잘못을 한 시므이에게 베풀고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온전한 용서(렘 31:34)와는 달리 다윗은 시므이를 용서하는 데 한계가 있었다. 용서는 했어도 그 잘못을 잊지 않고 끝까지 기억했던 것이다. 그래서 다윗은 죽음에 임박했을 때 아들 솔로몬에게 시므이가 자신에게 저지른 악에 대해 대가를 치러야 한다는 사실을 분명히 했다(왕상 2:8,9). 결국 솔로몬은 이 명령에 따라 시므이를 처형했다(왕상 2:36-46).

비록 다윗이 온전하지는 못했어도, “용서하는 마음”을 지녔다는 사실은 분명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그런 다윗을 하나님의 마음에 맞는 사람이라고 인정하셨던 것이다. 용서하는 데 있어서 부분적인 용서든, 조건적인 용서든, 일단 용서를 시작하는 것이 중요하다. 상대방에 대한 시기심에서 비롯된 쓴 뿌리로 일생을 망쳤던 사울과 달리 “용서하는 마음”을 지녔던 다윗을 하나님께서는 끝까지 쓰셨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B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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