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진리의 말씀을 올바로 나누어 자신이 하나님 앞에 부끄럽지 않은 일꾼으로 인정받도록 공부하라(딤후 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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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적 통제권을 상실한 교회들의 강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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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대로믿는사람들 <2023년 09월호>

한승용 / 킹제임스성경신학교 교수



남자에게는 남성적 속성이 있고, 여자에게는 여성적 속성이 있다. 각 속성의 강도는 사람마다 차이가 있다. 흔히 말하는 “마초”(macho), “상남자”처럼 남성 호르몬인 테스토스테론의 작용으로 남성적 속성이 강한 남자가 있는가 하면 그렇지 않은 남자가 있다. 여자는 여성 호르몬인 에스트로겐의 지배를 받는다. 그리스도인 남자에게는 『남자답게 처신하라. 강건하라.』(고전 16:13)라는 명령이 주어졌고, 그리스도인 여자에게는 『검소한 옷차림으로 스스로를 단장하되 수줍음과 정숙함으로 하며』(딤전 2:9)라는 명령이 주어졌지만, 그 표현력은 타고난 남성적, 여성적 기질, 또 외모와 결부되어 성도마다 그 표출 강도가 다를 수 있다. 하지만 남녀의 “역할”과 관련한 문제에 있어서는 남성적, 여성적 속성에 따른 정직한 접근법이 필요하다. 즉 모든 남자에게는 남성적 역할이 요구되고 모든 여자에게는 여성적 역할이 요구된다. 즉 “속성”에 맞는 “역할”이 요구되는 것이다.

세속 작가인 로버트 그린(Robert Greene)은 그의 저서 <인간 본성의 법칙, The Laws of Human Nature>(위즈덤하우스, 2019), 「Law 12 젠더 고정관념의 법칙」에서 남녀의 역할에 관해 다음과 같이 기술했다. “수천 년간 대체로 남성적 역할과 여성적 역할의 정의를 내린 것은 남자였다. 성 역할에 대해 가치 판단을 내린 것도 남자였다. 여성적 사고방식은 비이성적인 것으로 연상됐고, 여성적 행동은 약하고 열등한 것으로 보았다. 양성 간의 불평등이라는 측면에서 우리는 겉으로는 진보했을지 몰라도, 속으로는 이런 식의 판단이 여전히 깊이 뿌리내려 있다. 남성적 사고방식은 아직도 우월한 것으로 존경받고, 여성성은 여전히 부드럽고 약한 것으로 경험된다. 많은 여성들이 이런 판단을 자기 것으로 받아들였다. 그들은 평등을 ‘남자만큼 터프하고 공격적이어도 된다’는 뜻으로 생각한다”(p.554).


그린의 관점대로 인류 역사는 남성 주도적으로 흘러온 것이 맞다. 하지만 그러한 흐름은 하나님께서 최초의 인류가 범죄한 뒤에 내리신 명령의 결과였다. 『너[여자]의 바람은 네 남편에게 있을 것이니, 남편이 너를 주관할 것이라』(창 3:16). 이와 같은 명령 이후 역사는 남성 주도적으로 되었지만, 지난 6천 년간 남성적 역할과 여성적 역할에 정의를 내린 것은 남자도 여자도 아니었다. 그 둘의 역할 구분 역시나 하나님께서 하신 일이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인간에게 각 성별에 맞는 본성을 부여하심으로써 남녀 각자의 본성에 맞는 역할을 하게 하셨다.



이 점은 영적인 일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일례로 지역 교회에서는 남자를 여자에게 권위를 행사하는 위치에 있게 하심으로써 자매가 형제의 일을 넘보지 못하게 하셨다. 『남자는 하나님의 형상과 영광이므로 마땅히 머리에 쓰면 아니되지만 여자는 남자의 영광이니라. 이는 남자가 여자에게서 난 것이 아니라 여자가 남자에게서 났기 때문이며 남자가 여자를 위하여 창조된 것이 아니라 여자가 남자를 위하여 창조된 것이기 때문이라. 이런 까닭에 여자는 천사들로 인하여 머리 위에 권위를 두어야 하리라』(고전 11:7-10). 『각 남자의 머리는 그리스도시요, 여자의 머리는 남자요, 그리스도의 머리는 하나님이시니라』(고전 11:3). 『여자는 온전히 순종함으로 조용히 배우게 하라. 나는 여자가 가르치는 것이나 남자에게 권위를 행사하는 것을 허락지 아니하노니 다만 조용할지니라』(딤전 2:11,12). 여자가 남자를 자신의 권위로 두어야 하는 이유는, 남자(아담)가 먼저 지음 받았고 그 후에 여자(이브)며, 또 남자(아담)가 속아 범죄한 것이 아니라 여자(이브)가 속아서 범죄한 것이기 때문이다(딤전 2:13,14).

남자에게 권위를 주는 것이 순리임에도 세상은 그것을 “남성 우월적”이라는 말로 폄훼한다. 인류 역사가 남성 주도적으로 이뤄진 것은 맞지만, “남성 우월적”이라는 말은 성차별을 반대하는 인본주의자들이 지어낸 용어일 뿐 성경적이지는 않다. 로버트 그린의 주장처럼 세상은 남성을 우월하게 보고 여성을 약하고 열등하게 보지만, 하나님께서는 결코 그렇지 않으시다. 『그러나 주 안에서는 여자 없이 남자만 있을 수 없고 남자 없이 여자만 있을 수도 없느니라. 이는 여자가 남자에게서 나는 것같이 남자도 여자를 통하여 나거니와 모든 것은 하나님에게서 나기 때문이라』(고전 11:11,12).



하나님께서는 “권위”와 “역할”의 문제에 있어서 남녀를 구분하실 뿐, 존재론적 중요성에 있어서는 그들 각자를 동등하게 보신다. 따라서 여자가 여자로서 존중받는 길은 『주 안에서』 남자를 만나 가정을 꾸리는 것이다. 『주 안에서』 하나님의 일에 헌신하여 자신의 위치에서 신실하게 섬기는 것도 존중받는 길이다. 성경에는 교회의 일꾼 된 자매 페베(롬 16:1)와 사도들을 위해 많이 수고한 마리아(롬 16:6), 바울과 함께 애쓰고 수고한 유오디아와 순두케(빌 4:2,3) 같은 자매들의 이름이 언급된다. 사도 바울은 그 여인들을 바울 자신의 동역자로서 존중했다. 육신적인 남녀 차별이 지배하는 현 세상에서는 그리스도인 자매들도 차별 대우를 받을 수밖에 없지만, 『주 안에서』는 진정한 “남녀평등”이 이뤄진다. 이에 무지한 교회의 여자들이 세상을 흉내 내어 남자의 권위와 역할을 넘봄으로써 그들의 입에서 “남녀 불평등”이라는 볼멘소리가 터져 나온 것이다.

최근 들어 “생물학적 男,” “생물학적 女”라는 말이 심심찮게 들려온다. 교회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성전환 수술로 타고난 성별을 바꾼 트랜스젠더들이 늘어나면서 그들을 설명하는 용어로 자리잡았는데, “생물학적 男”은 어떤 남성이 트랜스젠더가 되어 스스로를 여성이라 한다 해도 “생물학적으로는 남자”임을 의미할 때 사용한다. 반대로 성전환 수술로 남자 행세를 하는 “자칭 남자”는 “생물학적 女”라고 부른다. 최근 캐나다에서 열린 “여성” 파워리프팅 챔피언십 대회에서 전국 신기록을 세우며 1위를 차지한 선수가 “생물학적 男”이었다는 웃지 못할 소식도 있다. 그런데 이 “생물학적 男” 이야기는 미국 기독교계에서도 이슈가 되고 있다. 언론에 따르면 미국 남침례신학교 총장인 앨버트 몰러(Albert Mohler)가 그의 온라인 팟캐스트 ‘더 브리핑’(The Briefing)에서 “‘남성’만이 목회자로 섬길 수 있다고 결정한 남침례회의 기준을 ‘생물학적 남성’으로 명시해야 한다.”라는 청취자의 지적에 동의하며 “언젠가 남침례회가 트랜스젠더 목회자가 있는 교회를 제명해야 하는 상황이 곧 닥치는 것은 시간문제인 것 같다.”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그 청취자의 입장은, 오늘날 “남성”이라는 표현은 “트랜스젠더 남성”을 가리킬 수도 있기 때문에 차라리 “생물학적 남성”을 목사의 기준으로 제시함으로써 성전환자들이 목사가 되는 길을 능동적으로 막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여자가 목사가 되는 것도 모자라, 아예 성전환 수술로 “남성”이 된 범죄자들이 “남자 목사” 행세를 하는 실로 통탄스런 시대가 된 것이다.

우리가 “명심(銘心)해야 할,” 즉 “잊지 않도록 마음에 깊이 새겨야 할” 진리는, 성경에서 제시하는 목사의 자격 요건이 “여자”도 아니고 “트랜스젠더 男”도 아닌, 문자 그대로의 남성, 곧 “생물학적 男”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감독은 비난받을 일이 없어야 하고, 한 아내의 남편이어야 하며』(딤전 3:2). 『내가 너를 크레테에 남겨 놓은 이유는 너로 부족한 일들을 바로잡고, 내가 명한 대로 각 성읍에 장로들을 세우게 하려 함이니 누가 되더라도 비난받을 것이 없고 한 아내의 남편이어야 하며... 감독은 하나님의 청지기로서 비난받을 것이 없고』(딛 1:5-7). 사도 바울이 언급한 “감독”과 “장로”는 모두 “목사”를 가리킨다. 성경의 저자이신 성령님께서는 목사의 자격 요건이 『한 아내의 남편』임을 성경에 “두 번” 기록하셔서 그것을 새겨듣게 하셨다. 여기서 “남편”은 하나님께서 이브에게 말씀하셨던 바로 그 남편의 개념이다! 『너의 바람은 네 남편에게 있을 것이니, 남편이 너를 주관할 것이라』(창 3:16). 이브의 남편은 아담이었다. 아담은 남자, 곧 “생물학적 男”이었다. 최초의 인류에게 21세기의 “트랜스젠더 男”과 같은 개념은 없었다. 하나님께서는 남자인 남편이 여자인 아내를 주관할 것이라고 처음부터 정하신 것이다. 즉 “생물학적 男”이 “생물학적 女”를 주관하라는 것이다. 여자가 남자를 주관해야 한다는 말은 성경에 없다. 여자가 남자에게 성경을 가르치고 그에게 권위를 행사하는 일을 성경은 결코 허락하지 않고 있는 것이다(딤전 2:12).


하나님께서는 그분께서 지으신 인간이 해야 할 일들을 그분의 말씀인 성경에 상세히 기록해 두셨다. 바로 그것을 지키는 것이 사람의 모든 의무라고 솔로몬은 역설했다(전 12:13). 살아 계신 하나님의 말씀이 『한 아내의 남편』을 목사로 세워야 한다고 하셨음에도 기어코 여자를 목사로 세우는 자들은 제정신인가? 『한 아내의 남편』이란 말씀을 왜 그토록 못 알아보는 것인가? 깨닫기가 그렇게 어려운 것인가? 그들처럼 영적으로 “눈먼” 소경들이요 단순한 글자도 읽어내지 못하는 “문맹”들이며, “까막눈”에 “눈뜬장님”인 자들에 관해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다음과 같이 판단하셨다. 『너는 비참하고, 가련하며, 가난하고, 눈멀고, 헐벗은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 안약을 네 눈에 발라 보게 하라』(계 3:17,18).

마지막 때의 교회 강단은 유약한 남자들로 채워져 있다. 『때가 이르리니 사람들이 건전한 교리를 견디지 못하고, 그들 자신의 정욕에 따라 가려운 귀를 즐겁게 해줄 선생들을 많이 두리라』(딤후 4:3). 목사들이 교인들의 비위를 맞추어 목회하는 시대가 바로 지금이다! 회중 눈치나 보고 “죄”를 지적하지 못하며 “지옥”에 관해 설교하지 않는 강단은 영적 통제권이 회중에게 넘어가 있다. 게다가 여자들까지 나서서 강단의 통제권을 강탈하고 있다. 이 점은 학생에게 교사가 얻어맞는 시대적 상황과 맞물려서 매우 중요한 점을 시사한다. 『내 백성으로 말한다면 아이들이 압제자가 되며, 여자들이 그들을 지배하는도다. 오 내 백성아, 너를 인도하는 그들이 너로 탈선하게 하여 너의 진로를 멸망시키는도다』(사 3:12). 지금은 아이들과 여자들에 대한 통제권이 상실된 시대이다. 심판 전의 이스라엘이 무정부 상태였듯이, 여자 목사가 남자들을 지배하는 교회들 역시나 영적 무정부 상태에 있다. 이스라엘의 무정부 상태의 끝에는 준엄한 심판이 있었다. 거듭나지 않은 교인들로 채워지고 여자들이 강단을 더럽히는 교회들은 이제 곧 대환란에 던져질 것이다. 세상 학교들은 교권 추락을 한탄이라도 하지만, 세상 교회들은 권위의 추락에 아무런 감각이 없다. 여자가 집에서 앞치마를 두르고 가족을 뒷바라지하는 모습은 여성스럽고 사랑스럽다. 앞치마를 벗어 던지고 강단에 올라가 변개된 성경을 들고 외치는 여자들은 교회들의 타락에 정점을 찍은 마귀의 종들임을 알아야 한다. B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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