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진리의 말씀을 올바로 나누어 자신이 하나님 앞에 부끄럽지 않은 일꾼으로 인정받도록 공부하라(딤후 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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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으로 “하나님의 공의”를 유린하는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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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대로믿는사람들 <2005년 06월호>

“인권”으로 “하나님의 공의”를 유린하는 사람들
- 사형폐지입법화 촉구대회 바로 보기



캐치프레이즈(Catchphrase)
교회사 마지막 기간인 ‘라오디케아 교회 시대’의 표어는 “인권”(human rights)이다. 이는 일찍이 『탑』 꼭대기를 높이 쌓기 위해 모였던 사람들이 표방했던 내용과 정확히 일치한다. 『“가서 우리를 위하여 도성과 탑을 세우되... 우리의 이름을 내자. 그리하여 우리가 온 지면에 멀리 흩어지지 않게 하자.”』(창 11:4). 이들은 “우리”라는 표어를 내걸고 『땅을 다시 채우라』(창 9:1)는 “하나님”의 명령을 거스른 채, 지면에서 흩어지지 않으려 했던 것이다. 해 아래 새 것은 없다(전 1:9). 현대의 “바벨탑” 후손들은 “인권”을 내걸고 “하나님”의 진리를 대적하기 위해 또다시 한자리에 모였다. 지난 87년부터 약 18년간을 추진해 온 이 안건은 이제 막 실효를 거두기에 이르렀다(창 11: 6). 지난 4월 20일, 이 나라 종교인들은 “그 동안 인권을 유린해 왔던 사형제도를 폐지하자.”고 결의문을 낭독하는 등 제도 폐지를 위한 입법화 촉구대회를 열었다. “종교”를 상징하는 『탑』 아래에 하나로 모였던 사람들처럼, 종교의 경계선을 넘어선 “사형폐지를위한범종교연합”(공동대표 문장식 목사)은 “인권”을 내세우며 동일한 목표를 관철시키려 했던 것이다. 최근 <한국사회여론조사연구소>의 조사결과에 따르면 여전히 사형폐지 반대 여론이 55.2%로 우위를 점하고 있으나, 지난 8년간 한 번도 사형집행이 이루어지지 않았던 상황을 감안하면 “입법화”의 실현도 얼마 남지 않은 듯 보인다. 종교 간의 벽을 넘어설 정도로 그들이 내세운 표어는 한마디로 “인권의, 인권에 의한, 인권을 위한 사형폐지”였다. 과연, 이들의 표어는 옳았던 것인가? 필자는 본 글을 통해 최근 교계 이슈가 되었던 “사형폐지입법화 촉구대회”를 성경적으로 짚어 보았다.

대전제 “죄의 삯은 사망”
사형폐지를 주장하는 사람들이 입버릇처럼 이야기하는 것은, “사랑의 하나님께서...” “생명을 존중하시는 하나님께서...” “인간을 자신의 형상대로 창조하신 하나님께서...”란 말이다. 그들의 의도는 “그런 하나님이 그런 비인간적인 제도를 기뻐하실 리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땅에 죄가 들어온 이래, 하나님께서는 죄인인 인간을 향한 “사형선고”를 한 번도 철회하신 적이 없으셨다. 『이런 연유로 한 사람에 의하여 죄가 세상으로 들어오고 그 죄에 의하여 사망이 왔으니 그리하여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전달되었느니라』(롬 5:12). 따지고 보면 모든 인간은 사형선고를 받은 예비사형수로서 남은 생을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대전제를 선언하신 하나님께서는 “사형제도” 또한 합법적인 제도라고 말씀하신다. 율법 이전 시대(창 9:5,6), 율법 시대(민 35장), 율법 이후 시대(행 25:11, 롬 13:1-4) 그 어느 시대든 이 “사형제도”는 발견되고 있다. 사형은 결코 하나님의 뜻을 반하는 행위가 아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이 그 정당성을 확고히 해주고 있다. 폐지론자들의 주장대로 사형제도를 폐지하여 사형수들의 생명을 연장시켜 준다 해도,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반드시 공의의 심판을 행사하실 것이다. 이유가 무엇인가? 『내가 반드시 너희 생명의 피를 찾으리니... 내가 그 사람의 생명을 찾으리라. 사람의 피를 흘리는 사람은 사람에 의해서 자기의 피도 흘려지게 되리니...』(창 9:5,6).

인권으로 공의 무너뜨리기
종교인들의 주장은 성경이 아니라 헌법 제10조를 근거로 하고 있다.『모든 국민은 인간으로의 존엄과 가치를 가지며 행복을 추구할 권리를 가진다. 국가는 개인이 가지는 불가침의 기본적 인권을 확인하고 이를 보장할 의무를 진다.』즉 인간이 가진 생명권은 소중한 것이기에 이를 보장하기 위해서는 사형제도를 반드시 폐지해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인간의 생명은 소중한 것이고 그 가치를 전적으로 부인할 수도 없다.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의 공의와 성경적인 원칙을 부인한 채, “인간의 생명권”만을 강조하는 것이 옳은 일일까? 죄에 대한 형벌이 뒤따르는 것은 당연한 일이며, 그 죄목에 따라 형벌이 결정되는 것도 상식적인 일이다. 형벌의 일환으로 사형이 선고될 수 있는데, 이는 “죽을 만한 죄목”이 분명히 있기 때문이다. 『만일 내가 무엇을 위반했거나 죽을 만한 일을 했다면 죽기를 사양치 아니하리이다』(행 25:11). 결코 생명에 대한 “인간의 권리”가 공의를 행사하셔야 하는 “하나님의 뜻”보다 앞설 수는 없다. 사랑의 하나님은 공의의 하나님이시기도 하다.
대회 당일 설교를 맡은 김상해 목사는 “인권과 생명”(마 16:26)이라는 제목으로 “예수님의 제자로서 그 도를 좇아 인권의 중요성을 인정해야 한다.”며 사형제도폐지의 정당성을 설교했다. 그러나 본문을 확인해 보면 그 설교가 사사로운 해석 이외에는 아무것도 아님을 알 수 있다. 『사람이 온 세상을 얻고도 자신의 혼을 잃는다면 무슨 유익이 있겠느냐? 또 사람이 자기 혼을 무엇과 바꾸겠느냐?』(마 16:26) 본문은 인간의 생명을 다루고 있긴 하지만 인권을 다루고 있지 않다. 본문에 따르면 하나님께서 사형으로 사라질 육체의 생명보다는 혼에 더 큰 관심을 두고 계심을 알 수 있다. 본문의 핵심은 “제자도”이지, “인권”이나 “사형제도”와는 아무 관련이 없다. 문맥상 『자기를 부인』(마 16:24)할 것에 대해 말씀하시는 것을 볼 때, “인권”을 부인하는 것에 대해 설교하는 것이 오히려 본문에 가까운 설교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들은 계속해서 “인권”을 내세우며 어리석은 주장을 반복한다. “궁극적으로는 생명권을 보장해야 할 국가 책임을 저버린다는 점에서 폐지되어야 한다.” 사형제도의 존속이 과연 국가로서의 책임을 저버리게 하는 것인가? 그렇다면 공의를 저버리게 하는 것은 국가로서의 책임을 강화하는 것이란 말인가? 『각 사람은 위에 있는 권세자들에게 복종하라... 그는 너에게 선을 이루기 위한 하나님의 일꾼이라. 그러나 네가 악을 행하면 두려워하라. 이는 그가 헛되이 칼을 가지고 다니지 아니하기 때문이라』(롬 13:1-4). 본문과 관련하여 칼의 기본적인 기능이 무엇인가? “죽이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세우신 권세자들은 악을 행하는 자들을 위해 칼을 “헛되이” 가지고 다니지 않는다. 이로 인해 사람들은 악을 행하려다가도 두려워서 멈추게 되는 것이다. “사형”을 집행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일꾼이요, 악을 행하는 자에게 진노를 행하는 보응자』(롬 13:4)들이다. 사형 폐지론자들은 범죄자들의 생명권을 보장하기 위해 팔을 걷어붙였지만, 칼을 들고 다니는 사람들은 그들 외 다수의 생명권을 보장하기 위해 팔을 걷어붙인 사람들이다. 어떤 것이 더 국가로서의 책임을 강화하게 하는 것인가? 그들이 지향하는 “인권 선진국”은 오히려 질서도 없고 공의도 없는 국가를 말하는 것이며, 국가로서의 책임을 저버리게 하는 것이다.
인권! 범죄자의 인권이라고? 하나님께서는 죄인들이 멸망하지 않고 회개에 이르게 하시기 위해 자비 가운데 오래 참고 계신다. 그러나 하나님의 인내와 오래 참으심이 끝나는 시점에서는 자비 없는 심판만이 남아 있다. 노아의 홍수, 불로 멸망당한 소돔, 이스라엘의 멸망을 생각해 보라. 하나님께서 공의를 행하시고 죄를 벌하실 때, 이들의 인권을 고려하셨는가? 앞으로 다가올 대환란과 백보좌 심판석에서 “인권이 어떻다느니” 하는 말이 통할 것 같은가? 인권은 결코 공의를 앞설 수 없는 법이다.

오판이라고?
역사적으로 사형제도가 독재정권의 정치적 탄압의 수단으로 악용되어 왔다는 부정적인 측면이 있다는 것은 사실이다. 국제인권옹호 한국연맹의 조사결과를 보더라도 한국의 전체 법관 중 35%가 한 번 이상의 오판 경험을 갖고 있기에(크리스챤뉴스위크, 2005. 4.30, 4면) 분명 억울하게 죽은 사람들도 상당수 있을 것이다. 종교인들은 이를 근거로 폐지의 정당성을 내세우지만 사실 그런 수치는 무의미한 것이다. 역으로 생각해서, 75%의 정확한 판단에 의해 사형이 집행되어야 할 사람들이 죽었다면 그것은 오히려 정의와 공의를 강화하는 데 큰 역할을 한 것 아니겠는가? 따라서 이것은 재판에 대한 정확성을 기하기 위해 노력할 문제이지, 사형제도 자체를 폐지해야 할 근거로서는 논리가 빈약한 것이다.
이것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여러분은 신약 교회사에서 오판(정확히 말해서 고의적인 살해를 위한 종교재판)으로 죽어간 수많은 성경대로 믿는 사람들을 알고 있는가? 지금 그들의 피가 부르짖고 있다(창 4:10). 피는 복수를 요구한다(계 6:10). 기본적으로 피는 그 피를 흘리게 한 사람의 피가 아니고는 땅이 깨끗해질 수가 없는 법이다(민 35:33, 마 27:25, 행 5:28). 그런데 이들 가운데 억울한 죽음을 막기 위해 “사형제도”를 폐지하자고 했던 사람이 있는가? 역사상 가장 큰 오판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이었다. 『...자기에게 저질러진 죄인들의 그와 같은 모순된 행동들을 견뎌 내신 그를 깊이 생각하라』(히 12:3). 이는 인간이 창조주 하나님을 심판하고 사형에 넘긴 가장 모순된 사건이었다. 그럼에도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억울한 죽음을 호소하며 “사형제도”를 폐지해 달라고 기도하지 않으셨다. 그 시각에 예수님은 회개한 한 강도와 대화를 나누고 계셨는데(눅 23:39-43), 대화의 주제는 “인권”도 “사형폐지”도 아니었다. “낙원에 대한 소망”이었다. 죽음을 앞두고 마음이 가난해진 사형수에게 복음을 전하여 영생의 소망을 갖게 하라. “사형제도”를 폐지하는 것이 사형수의 인권을 보호하는 길이 아니다. 구원받지 않은 사람이 소망 없는 짧은 생애에서 “인권”을 누린다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사형제도를 폐지하면 교화 및 개선이 가능한가?
사형폐지 특별법안은 범죄자의 인권 보호 및 교화, 개선을 목표로 하고 있다. 그러나 사형의 궁극적인 목적은 교화와 개선이 아니라 악을 제거하고 죄를 짓는 것을 두려워하게 하는 데 있다. 『그러면 그의 성읍의 모든 사람들은 그를 돌로 쳐 죽일지니 그리하여 너는 너희 가운데서 악을 제거하라. 그러면 모든 이스라엘이 듣고 두려워하리라』(신 21:21).
물론, 사형제도를 존속하는 것 자체가 범죄 억제를 가져오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런 이유로 사형제도를 폐지하자는 논리가 성립되는 것도 아니다. 더군다나 그들의 주장대로 폐지함으로써 인간이 교화되고 개선되는 것도 아니다. 인본주의 교육이나 철학은 결코 인간을 변화시킬 수 없다. 이는 범종교인들이 모여서 교화의 방법을 모색한다고 해서 되는 일도 아니다. 성경은 사람에 대해 무엇이라고 말씀하는가? 『마음은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악하니 누가 그것을 알 수 있으리요?』(렘 17:9) 한 가지 변화의 가능성을 타진해 본다면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여 거듭나게 하는 것이다. 아무리 완악한 죄인도 죽음 앞에서는 겸허해지기 마련이다. 구원받은 사람들만이 변화의 계기가 주어질 수 있다.
자, 이제 그들이 구원받았으니까 사형을 면해 주어야 하지 않겠는가? 결코 그렇지 않다. 『죄의 삯은 사망』이라는 대전제는 그리스도인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심는 대로 거두는 것이 하나님의 원칙이다. 그리스도인이라고 해서 달라질 것은 없다. 그렇다면 구원받은 사형수들의 의미있는 생이란 무엇인가?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기까지 그 감옥에서 다른 죄수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영생의 소망을 전하며 진리를 위해 사는 것일 것이다. 상황에 차이가 있겠지만 죽음을 앞두고 바울은 디모데후서를 기록했고, 베드로는 베드로후서를 기록했다. 루터는 감옥에서 독일어로 성경을 번역했고, 존 번연도 감옥에서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을 감동시킨 천로역정을 저술했다. 생명의 주관자이신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환경 가운데서 진리를 위해 자신의 몸을 드리도록 하자.

에큐메니칼 = 혼돈2
범종교인들은 사형제도의 대안으로 감형 없는 “절대적 종신형 제도”를 제시했었지만, 이제는 더 인도적이고 합리적인 대안을 모색하고 있다. 그 이유는 “사형수들”이 그 제도가 사형제도보다 더 가혹한 제도라고 절망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사형수들”이 절망하니까 더 인권적인 대안을 제시하겠다고? 이것은 일찍이 동생을 살해했으면서도 회개하기보다는 자신의 권리를 주장했던 카인의 태도를(창 4:13) 옹호하겠다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그들은 “사형수들”의 인권을 너무나 중시한 나머지 객관적인 사고마저 잃어가고 있는 것이다.
한국 기독교계의 가장 큰 문제점들 중 하나는 “최종권위”(Final Authority)의 부재다. 기준이 되는 신학도 없고 기준이 되는 성경적 교리도 없다. 교인들은 두 개의 상충되는 권위 사이에서 방황하고 있으니, 말 그대로 혼돈 속에 살고 있는 것이다. 기준이 없으면 경계선이 무너지기 마련이고, 경계선이 무너지면 사람들은 으레 통합하기 마련이다. 절대적인 기준이 없는 상황 속에서 교단 간, 더 나아가 종교 간 구분을 둘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에큐메니칼”이다. ‘사형수들을 어떤 방법으로 교화시키겠습니까?’라는 질문에 범종교인들이 어떤 대답을 할지 궁금하다. 성경? 불경? 카톨릭교리? 정치철학? 분명 제 목소리를 낼 사람은 없을 것이다. 혼란을 우려한 나머지 또 다른 통합을 위해 길을 모색할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에큐메니칼’의 실체는 통합이 아니라 혼돈이다. 절대적 기준이 없이 혼돈 가운데 있던 사람들끼리 모이면 혼돈은 가중되기 때문이다. 최초의 ‘에큐메니칼’이 낳은 결말이 어떤 것이었는지 성경을 통해 확인해 보라. 『바벨』, 곧 혼란 그 자체였다(창 11:1-9). 여러분이 분별있는 독자라면 이러한 혼란 속에 “인권”으로 하나님의 “공의”를 유린하는 사람이 되지 말고 성경적 진리 안에 확고하게 서길 바라 마지않는다. B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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