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진리의 말씀을 올바로 나누어 자신이 하나님 앞에 부끄럽지 않은 일꾼으로 인정받도록 공부하라(딤후 2:15).
기자의 논단 분류

한경직 목사를 다시 평가한다

컨텐츠 정보

본문

성경대로믿는사람들 <2005년 06월호>

한경직 목사를 다시 평가한다



한경직 목사가 죽은 지 벌써 5년이 흘렀다. 교계에서는 추모 5주기를 맞아 지난 4월 13일 한경직목사기념전시관을 여는 개관예배를 행했고, 그곳에 일반신도들이 출입하기 시작했다. 필자는 본지 100호에 <한경직 목사를 평가한다>는 제목의 글을 쓴 적이 있다. 그것은 『아버지께서 심지 않으신』(마 15:13) 한국기독교계의 거목이 뽑힌 후, 그의 글과 행적을 짚어가며 그 실체를 드러낸 글이었다. 겉으로만 무성했던 그 나무는 뿌리부터 썩은 후천년주의적 사회운동가였고, 오늘날 한국기독교가 이토록 타락하게 된 주원인이 그에게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는 로마카톨릭의 피리 부는 사나이 빌리 그래함과 세계를 누비고 다니며 연합과 일치를 위한 거대한 대회들을 이끌었고, 한국에서도 그와 같은 일들을 수행했다. 한국 최초의 정당이라 일컬어지는 기독교 사회민주당을 창당하고(1945. 9.), 한국기독교연합회 회장직을 역임하고(1955-56), 선명회 이사장직을 36년 동안 지내고(1964 -2000), 한국기독교연합회를 1989년에 재창설함으로써, 한국의 사회복음주의와 에큐메니칼 운동을 선두에서 지휘한 그는, 한평생 주님의 이름을 빙자해 마귀를 섬기며 마귀의 교리를 실행하다 생을 마친 것이다. 그러나 한국기독교계의 지도자나 교인들은 그를 잊지 못한다. 그가 성경적 믿음을 실행에 옮겼다는 증거가 어디에도 없는데도, 그들은 그의 말과 행적들을 회상하며 감탄과 존경을 표해 마지않는 것이다.

<크리스천투데이>지 4월 18일자 제4면을 보면, “한경직 목사, 그는 죽어서도 말한다”는 제목의 기사가 한 면 가득히 실려 있다. 이 기사는 김경래 장로와 김준곤 목사가 각기 다른 행사에서 한경직 목사에 대해 간증한 내용을 대서특필한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들이 뭐라 하든지 간에 이들의 간증을 통해 한목사가 어떤 인물이었나를 다시 한번 파헤쳐 볼 것이다(이하 인용되는 내용들은 <크리스천투데이>지의 기사이다).

김경래 장로의 간증
김장로는 한경직 목사 5주기를 앞두고 영락교회 본당에서 열린 노인예배에 초청되어 <한경직 목사와 한국교회 연합일치운동>을 주제로 강연을 했다. 그는 “하나님, 그 종이 남긴 업적, 이 적은 입술로 표현할 길이 없사오나...”로 기도를 시작했지만, 그가 한목사에 대해 간증한 내용은 진리와 아무런 관계도 없었다.

“한경직 목사님과 남한산성에 갔을 때... 그곳엔 새가 많았다. 어느 날 나에게 이리 와 보라 하시더니 ‘저 새들은 작년에도 똑같은 소리로 울었다네.’ 하시곤 ‘사람은 말이 달라. 작년하고 금년의 말이 다르단 말이야.’ 하고 회고했다.”
새들이 작년이나 금년이나 똑같은 소리로 우는 건, 그들이 그 소리밖에 낼 수 없기 때문이요, 사람의 말이 작년 다르고 금년 다른 건, 『사람은 모두 거짓말쟁이』이기 때문이다(롬 3:4). 새들이 똑같은 소리로 우는 건 유치원생도 아는 사실이고, 사람의 말이 늘상 변하는 건 성경을 조금만 읽어도 알 수 있는 사실이거늘, 한목사가 이런 말을 한 것이 뭐 그리 대단한 일이라고 ‘공자왈 맹자왈’ 新사서삼경을 쓰려 하는지 그저 한심할 따름이다.

“부활절 연합예배를 알리는 신문광고에 몇백 명의 이름이 깔려 있었다. 공동회장은 누구누구요, 부회장, 대표회장은 누구누구요... ‘아... 생각해 보라고. 교회에 공동목사, 공동당회장, 대표회장이 있어서야 되겠는가... 수십 명의 공동대표, 수십 명의 부회장... 이게 하나님이 보실 때에 한국 교회가 부패한 징조예요.’”
한목사의 이 말에는 그가 생전에 한국 교회의 연합과 일치를 향해 가졌던 강한 갈망이 담겨 있다. 그가 볼 때 한국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을 변개시킴으로써 이익을 취하는 여러 사람들』에 의해 만들어진 <개역성경>을 쓴다든지(고후 2:17), 그런 성경에서 나온 『마귀들의 교리들』을 따르기 때문에(딤전 4:1) 부패한 것이 아니요, 오로지 ‘초교파적으로 연합하지 못했기 때문에’ 부패한 것이다. 적그리스도가 다스리는 세상을 위해 종교를 하나로 모으려는 것은 마귀의 교리 중 하나인데, 한목사는 이것을 실행하지 못한 한국 교회가 부패한 것으로 보았던 것이다. 한목사는 한국 교회가 마귀에게 바쳐지기를 바랐던 인물이었으며, 그는 바로 이 일을 위해 일생을 바쳤던 것이다.

“전두환 대통령이 득세할 때는 기독교 목사들이 그를 위한 조찬기도를 했소. 그런데 하야했을 때는 왜 그를 위해 기도 못하는가 말이요. 득세할 때 몰리고 몰락하면 나몰라라하는 것인가. 그가 흥할 때도 망할 때도 같이 기도해야 하는 게 아니냔 말일세.”
조찬기도회가 무엇인가? 그것은 미사에도 참석하고, 교회예배에도 참석하고, 절간에 가서 절도 하는 『매사에 너무나 미신적』인 대한민국 대통령이 부강한 국가 건설을 위해 기독교 목사들을 불러들여서 그가 『알지 못하는 신에게』 기도해 줄 것을 부탁하고 아침밥 먹는 모임이다(행 17:22,23). 대통령이 지옥에 가지 않도록 혼의 구원을 위해 기도한다든지, 그에게 복음을 전한다든지, 이 나라 백성들이 참 하나님을 알고 주님을 두려워하도록 기도하는 모임이 아닌 것이다. 한목사는 조찬기도회의 성격을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런 그가 전두환 전 대통령이 전국민을 속인 극악한 죄로 하야하게 되었는데, 그를 위해 무엇을 기도하라고 한 것일까? 그의 혼의 구원을 위해? 천만의 말씀이다. 빼돌린 돈을 다 내놓도록? 설마 그럴 리 없다. 한목사는 그저 인간적 의리에 대해 질타했을 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전두환 씨는 한목사가 기독교 목사들에게 가한 질타가 무색할 정도로, 기도 같은 것 안 받아도 아주 잘살고 있다. 전씨는 더 이상 『왕들과 권세 있는 모든 사람』 중 하나가 아니기 때문에 그를 위해 『간구와 기도와 중보와 감사』를 해야 할 성경상의 어떤 명목도 없다(딤전 2:1,2). 그런데도 그를 위해 무엇을 기도하라는 것인지, 그의 이런 말을 우리가 왜 높이 사며 존중해야 하는지, 도무지 그 이유를 알 수가 없는 것이다.

“여의도 광장에서 한경직 목사님이 설교하실 때 무지개가 삭 뜨고 한목사님이 ‘닷새 동안 해외선교를 나서겠다는 분은 그 자리에서 눈물로 일어서시길 바랍니다’라고 말하자 수십여 명의 청년들이 일어섰다... 현재 3,500명의 선교사를 파송하는 세계 2위의 선교대국이 된 것은 한경직 목사님의 이 같은 선교 열정이 컸다.”
무지개 뜨는 일이 그 무슨 대단한 일일까? 극히 신비주의적인 발상으로 한 인간을 높이려 하는 이 일이 가증스럽다 못해 웃기기까지 한다. 무지개란 것은 태양을 등지고 스프레이만 뿌려도 떠오르는 것으로, 누구나 자기 눈 앞에 무지개를 만들 수 있는 것이다. 만일 무슨 일을 할 때 무지개가 떠올라서 위대하게 된다면, 필자는 매일같이 태양을 등지고 스프레이만 뿌리고 있을 것이다. 진리가 없으니 매우 유치하기 짝이 없는 것이다. 또한 한목사의 선교 열정으로 3,500명의 선교사들이 해외로 나갔다고 했지만, 사실 이 땅의 교회들이 포화상태라서 더 이상 신학교 졸업생들을 수용할 수 없기에 해외로 보내는 것 아니던가? 설사 자진해서 나갔다고 하더라도, 그들의 열매가 무엇인가? 1년에 몇 명의 혼을 주님께로 이겨오는가 말이다. 그저 배고픈 사람들에게 국물이나 떠주고 옷이나 몇 벌 갖다 주고 교회로 끌어들여서 그들과 찍은 사진을 한국으로 보내면 선교지원비가 저절로 입금되는 것이 그들의 현실이다. 이것이 바로 한목사가 지녔던 선교 열정의 열매인 것이다.

“100주년 사업의... 양화진 선교사기념묘지공원을 재건할 당시를 회상하며 ‘묘지가 왜 이렇게 황폐했는가. 한국 교회가 교회 성장이라며 자기 교회만 키운다고 선조들의 무덤을 저렇게 황폐하게 했는가... 한국 교회가 이럴 수 있느냐’고 한 목사는 흐느껴 울었다.”
한목사는 남의 무덤 때문에 울었다. 그러나 그 자신이야말로 『보이지 않는 무덤 같아서 그 위를 밟고 다니는 사람들이 무덤인 줄 알지』 못했다(눅 11:44). 그를 통해 주님을 알려고 했던 사람들은 참된 생명을 보지 못하고 멸망으로 들어가거나 빛을 가장한 어둠의 일에 참여했던 것이다. 한목사는 혼들이 멸망으로 들어가는 관문과 같은 ‘무덤’의 역할을 자신이 했다는 사실에 흐느껴 울었어야만 했다.

김준곤 목사의 간증
13일 기념전시관 개회에 이어 17일 오후 5시에 열린 한경직 목사 추모예배 때 김준곤 목사는 ‘충성스런 참 선한 목자상’이라는 제목으로 설교를 맡았다.

“(연합사업에 대해) 생전에 한 번 거절 않으시고 굉장히 큰 국제행사들을 여러 개 치렀다... 한목사님은 성자시고 교부형 목자셨으며 교회사를 전공한 학자이자 연합사업에도 참여하지 않으신 게 없으신 지도자였다.”
따라서 그가 적그리스도의 길을 큰 열심을 가지고 예비했던 자였음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온유와 겸손과 청렴결백한 그분은 한국뿐만 아니라 세계 교회 속에서도 온갖 형용사를 다 갖다 붙여도 모자람이 없는 분”
과연 주님께서도 한목사를 그렇게 보실까? 『그러나... 인간의 판단에 의해서 판단받는 것이... 아주 하찮은 일이라』(고전 4:3). 『사람들 가운데서 크게 높임을 받는 것이 하나님 보시기에는 가증스러움이라』(눅 16:15). 김목사가 한목사를 하늘 끝까지 추켜세운다 해도 주님은 하늘에서 비웃으실 뿐이다. 왜냐하면 참으로 온유하고 겸손하신 분이요, 인간의 혀로 온갖 형용사를 다 갖다 붙여도 모자람이 없는 분은 다름아닌 주 예수 그리스도시기 때문이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서 배우라』(마 11:29). 『이로 인하여 하나님께서는 그를 지극히 높이시고 모든 이름 위에 있는 한 이름을 그에게 주사...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혀가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빌 2:9-11). 김목사는 자신의 혀로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렸어야 했건만, 기껏 한 인간을 칭송하는 데 그치고 말았다. 따라서 한목사는 그의 잘못된 믿음과 행실로 인해 죽어서까지 주님의 영광을 취하는 실로 가증스러운 존재가 되어 버린 것이다.
“평양이 한국의 예루살렘으로 알려졌던 시절, 공산정권 치하로 북에 있던 크리스천이 남으로 내려올 때 모세처럼 허허벌판에 데리고 와서 영락교회를 설립하신... 한국 교회의 모세와 같은 지도자.”
한목사가 남하한 배경이 허허벌판이라는 것만으로 그를 모세에 빗댄다는 것은 어리석음의 극치를 보여 주는 언사가 아닐 수 없다. 한목사가 모세라면, 그의 교인들은 유대인들이고, 북한군은 이집트 군대가 되는 셈인데, 그렇다면 한목사가 건넌 ‘홍해’는 어디에 있는가? 영락교회는 강북에 있지 않은가? 모세가 되려면, 적어도 한강은 건넜어야 하지 않은가?(이것은 어리석은 자에게 하는 어리석은 질문이다.) 당시 허허벌판에 무리를 끌고 이동한 사람은 그 수를 셀 수 없다. 한목사는 여러 피난민 중 하나에 불과했을 뿐인 것이다. 또한 그는, 김목사에 따르면, ‘모세처럼’ 허허벌판에 교인들을 데리고 와서 영락교회를 세운 장본인이었다. 그러나 그가 세운 것은 영락교회이지, 주님께서 인정하시는 교회가 아님을 분명히 알도록 하자. 바른 말씀에 근거한 바른 교리를 실행하지 않는 교회는 다른 기초 위에 세워진 어느 이상한 교회이지 주님께서 인정하시는 온전한 교회가 아니기 때문이다. 『다른 기초를 놓을 수 없나니 이 기초는 예수 그리스도시라』(고전 3:11). 그가 세운 것은 ‘교인들’이 모일 수 있는 한 건물이었다. 주님께서 성별하신 ‘구원받은 성도들’이 모여 함께 경배할 수 있는 교회가 아닌 것이다.

지금까지 두 사람의 간증을 통해 한경직 목사를 살펴보았다. 한목사에 대한 간증을 보면, 그가 진리를 실행했다는 증거가 조금도 보이지 않는다. 혼들을 구령한 이야기도 없고, 진리를 가르쳤다는 이야기도 없다. 그저 인간적인 면과 생전의 활동상만 부각시킬 뿐, 도무지 그리스도의 일꾼으로서 성경적인 믿음을 실행했다는 증언을 찾아볼 수가 없다. 하지만 이유는 간단하다. 김장로와 김목사가 한목사 안에서 ‘진리’를 찾아볼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새 지저귀는 얘기, 무지개 뜬 얘기, 전두환 씨 얘기, 무덤에서 흐느낀 얘기, 교회 연합과 일치 얘기, 북에서 내려온 얘기나 늘어놓는 것이다. 말하자면, 한국 교회가 기념비적인 인물로 자랑스럽게 내놓는 한경직 목사, 그는 별볼일없는 한국 기독교계의 속 빈 강정과 같은 존재였을 뿐이다. 하지만 어디 이 두 사람만 한목사를 따르고 있는 것인가? 한국 교회 전체가 한목사를 높이고 있고, 그의 믿음을 따르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한국 교회가 살아나려면 한경직 목사의 그늘에서 벗어나야 한다. 고인의 잘못된 믿음과 행적을 해마다 되뇌이며 칭송하는 일은 그의 거짓에 스스로를 더욱더 말려들게 하여 결국 파멸에 이를 것이기 때문이다. BB

전체 927 / 35 페이지
RSS
번호
제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