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진리의 말씀을 올바로 나누어 자신이 하나님 앞에 부끄럽지 않은 일꾼으로 인정받도록 공부하라(딤후 2:15).
신학논단 분류

“재창조”를 부인하는 가짜 흠정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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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대로믿는사람들 <2022년 05월호>

이송오 목사가 주님의 부르심을 받아 셋째 하늘로 떠나자, 그 사자 같은 분이 계실 때는 찍소리도 못하던 정동수가 그간 숨어 있던 굴에서 나와 말씀의 포도원을 망치려 하고 있다(솔 2:15). 그가 깨닫지 못한 것은, 자기가 대적하는 것이 이송오 목사가 아니라 “<한글킹제임스성경>”이라는 사실인데, 그는 그 불 같고 큰 망치 같은(렘 23:29) 말씀이 눈에 뵈지 않는 듯 철없이 행동하고 있다.

원래 “흠정역”(欽定譯)이라는 이름은 “황제가 친히 제정하거나, 그의 명령으로 제정된 번역 성경”을 뜻한다. 그래서 황제의 권위를 지닌 “권위역”(權威譯)이라고도 부르는데, 이 권위역이 영어로 “Authorized Version”(AV)이다. 권위역은 성경대로 믿는 그리스도인들이 믿음과 실행의 최종권위로 삼아 온 <킹제임스성경>(KJV)을 가리키는 이름으로, <킹제임스성경>은 영국의 제임스 왕의 명령으로 1611년에 완역된 이후 필라델피아 교회 시대의 대각성 운동과 세계 복음화의 선두에 선 “책들의 제왕”으로 군림했다. 성경대로 믿는 그리스도인들이 C.I. 스코필드와 클라렌스 라킨, 피터 럭크만 등을 통해서 배워 알고 있는 모든 성경적인 지식들은 <킹제임스성경>에 계시된 것들이다. 이 하나님의 책은 “킹제임스”(King James, 야곱 왕), 곧 “이스라엘 왕”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 빛나는 신성한 책인 것이다. 『왕의 말이 있는 곳에는 권위가 있나니, 누가 그에게 말하기를 “당신은 무엇을 하나이까?”라고 할 수 있느냐?』(전 8:4) 바로 이 말씀이 정확히 적용되는 말씀, “이스라엘 왕”의 권위를 지닌 역본이 바로 <킹제임스성경>이다.

즉 <킹제임스성경>에는 아무도 넘볼 수 없는 권위가 있기에 그 권위 있는 말씀을 향해서 “그 구절의 그 단어가 왜 그럽니까?”라고 아무도 따질 수 없다. 그 일을 하는 자는 마귀이며(창 3:1), 마귀의 종들이 자기 주인이 시키는 짓을 하고 있을 뿐이다. 그리스도인에게는 권위역에 기록된 말씀들을 문자 그대로 믿어야 할 의무가 있다. 왜냐하면 <킹제임스성경>은 만왕의 왕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온전한 계시이기 때문이다. <킹제임스성경>에 계시된 우주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역사는 주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온전한 진리들이기에, 우리는 그 성경에서 무엇이라고 말씀하시든지 그 말씀들을 온전히 믿고 따라야만 한다. 『성경이 무엇이라고 말하고 있느냐?』(롬 4:3)에만 관심을 둬야 하는 것이다.

정동수가 스스로 “흠정역”이라고 이름 붙여 팔아먹고 있는 것은 사실상 흠정역이 아니다. 왜냐하면 거기에는 왕의 권위도 없고, 왕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믿지 못해서” 제멋대로 바꿔 놓은 부분들이 많기 때문이다. 그것은 번역 실력의 문제가 아니라 “믿음 없음”의 문제이기에 사실상의 “변개”가 이뤄진 것이다. 즉 “현대판 오리겐”의 작품이다. 몰라서 오역했다면 나중에라도 교정하면 되지만, 오리겐처럼 “믿지 못해서” 변개했다면 그것은 죄를 지은 것이다! 우리는 주님께서 믿음 없는 자를 얼마나 싫어하시는지 성경을 통해 잘 알고 있다(마 14:31, 막 16:14, 요 8:46). 자기가 믿지도 않는 말씀을 왜 번역하겠다고 나서서는 <한글킹제임스성경>을 대적하고 있는가? 먼저 출간된 바른 성경을 대적하는 유사 킹제임스성경을 출간한 것이 성경의 저자이신 성령님의 사역이겠는가? 그분께서 한글로 된 킹제임스성경을 두 종류로 만드셨겠는가? 그래서 하나가 다른 하나를 공격하면서 말씀을 모독하게 하셨겠는가? 이것이 성령의 일인가, “마귀의 일”인가? 짝퉁은 언제나 진품 다음에 등장하는 법! <한글킹제임스성경>이 번역된 지 무려 “6년”이 지난 뒤에 출간된 정동수의 성경은 짝퉁임에 두말할 필요도 없고, 짝퉁은 반드시 진품과 다른 부분이 있기 마련이어서 그 다른 부분을 검토하면 “가짜 흠정역”의 실체를 단박에 알 수가 있다.

따라서 우선 검토해 볼 부분은 성경에서 우주의 “재창조”를 계시하는 말씀과 그 번역에 관해서인데, 재창조의 교리는 하나님을 아는 신학에 있어서 창세기의 첫 장부터 대두되는 핵심적인 진리이다. 믿음 없는 쭉정이들은 성경의 그 부분을 뜯어고치느라 여념이 없다. 그들이 왜 뜯어고치겠는가? 그 구절이 “매우 중요”하기 때문이다! 바로 “창세기 1:28”로서, <한글킹제임스성경>에는 아주 정확하게 번역되어 있다. 정동수의 번역과 비교해 보면 “정동수”가 “성경 변개자”들의 본을 따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복을 주시고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다산하고 번성하며 땅을 다시 채우고[replenish the earth] 그것을 정복하라...』(창 1:28, 한글킹제임스성경)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복을 주시고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다산하고 번성하여 땅을 가득 채우라. 땅을 정복하라...」(창 1:28, 흠정역)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창 1:28, 개역개정판)

사고가 정지된 인간이 아니라면 누구나 정동수의 짝퉁 흠정역이 1611년판 <킹제임스성경>을 따르지 않고 변개된 개역개정판을 따르고 있음을 알게 된다. 하나님께서는 노아에게도 아담에게 주신 것과 동일한 명령을 주셨는데, 이 부분 역시나 정동수의 짝퉁은 변개시켰다.

『하나님께서 노아와 그의 아들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다산하고 번성하여 땅을 다시 채우라[replenish the earth]』(창 9:1, 한글킹제임스성경). - 노아가 홍수로 비워진 땅을 “다시” 채우는 게 맞지 않은가!

「하나님께서 노아와 그의 아들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다산하고 번성하여 땅을 가득 채우라」(창 9:1, 흠정역).

정동수는 노아가 살던 이전 세상이 물로 심판을 받아 사라지고 물이 빠진 새 세상을 노아가 “다시 채워야” 한다는 상식에 미치지 못했다. 성령님께서 fill(채우다)이라는 단어 대신 replenish(다시 채우다)를 사용하셨다면 성경의 저자이신 분의 분명한 의도가 있는 것이다. 정동수와 같은 부류는 『태초에 하나님께서 하늘과 땅을 창조하셨느니라. 땅은 형체가 없고 공허하며 어두움이 깊음의 표면에 있으며 하나님의 영은 물들의 표면에서 거니시더라.』라는 창세기 1:1,2을 하나의 창조 기사로 보고, 아담에게 땅을 “다시” 채우라고 하셨을 리가 없다는 생각에 <킹제임스성경>의 replenish를 “가득 채우다”로 변개한 것이다. 하나님께서 왜 최초의 우주를 창조하실 때 “형체가 없는 일그러진 땅”과 “어두움”과 “우주를 뒤덮은 물들”로 “지저분하게” 시작하셔야 했을까? 또 창세기 1,2장의 창조의 일곱 주간에는 창세기 3장의 에덴의 동산에서 이브를 유혹했던 “사탄”과 그가 언급한 『신들』(창 3:5)을 창조한 기사가 없는데, 그 영적 존재들은 어디서 “불쑥” 생겨나서 모습을 드러낸 것인가? 그들도 아메바에서 진화했는가? 성경의 “그룹들”과 “스랍들,” “천사들,” 엘리야를 데려간 “불말들과 불병거”(왕하 2:11)가 창조의 일곱 주간 중 “몇째 날”에 지음받았는지 정동수는 답변해 보라.

영적 존재들은 창세기 1:1의 최초의 창조 이후에 지음받은 것이고, 그들 가운데 반역자들이 나오자(겔 28:14-19) 루시퍼에게 맡기셨던 세상을 주님께서는 우주적인 물로 심판해 버리셨다(창 1:2). 그리고 3절에서 『빛이 있으라.』라고 하심으로써 “재창조”를 시작하신 것이다. 따라서 앞서 밑줄 친 창세기 1:2은 루시퍼의 반역으로 이전 세상이 물로 심판을 받아 땅이 일그러지고 어두움이 우주에 있게 된 매우 부정적인 상황을 묘사한 것이다. 2절에서 우주를 뒤덮고 있던 깊음은 1절의 최초의 창조 세계를 심판하실 때 사용하신 바로 그 물들인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이야기하면 정동수 같은 자들은 매스꺼운 미소를 지으며 “아, 그것은 럭크만의 가르침이잖아요!”라고 반박하는데, 그들은 “럭크만 박사가 가르쳤기 때문에 틀렸다”는 논리로 진리를 회피하려 들 뿐이다.

럭크만 박사가 가르쳤기 때문에 틀렸다는 것이 성경 어디에서 나온 논리인가? 럭크만 박사는 자신의 사견으로 성경의 진리를 단 한 번도 왜곡한 적이 없다. 모르면 모른다고 했던 정직하고 겸손한 분이셨다. 존 칼빈 이래로 500여 명 이상의 유명하다는 성경 주석가들의 오류를 일일이 지적하여 바로잡은 세계 최고의 신학자의 가르침은 성경의 내적 증거들로 구축된 교리의 사령탑이다. 럭크만 박사의 가르침은 바른 교리가 무엇인지를 우리에게 성경의 권위로 교시해 준다. 그렇다면 <킹제임스성경>에 기록된 replenish가 왜 “다시 채우다”라는 뜻으로 해석되고 번역되어야 하는지 “럭크만 박사의 가르침”을 들어 보자.

「“권위역”을 두 구절도 읽기 전에 “문제”가 발생했다. 과연 지구는 창세기 1:2 이후에 재창조되었을까? 창세기 1:1과 창세기 1:3 사이에 “간격”(gap)이 있었던 것일까? 간격 “이론”이란 것은 없다. 창세기 1:1과 1:3 사이의 “간격”은 “물”(H2O)로 채워져 있다. 『땅은 형체가 없고 공허하며 어두움이 깊음의 표면에 있으며 하나님의 영은 물들의 표면에서 거니시더라』(창 1:2). 창세기 1:2의 “깊음”(the Deep)과 “물들”(the waters)은 “홍수”의 결과이다(벧후 3:5). 그것은 다니엘 9:26이나 요한계시록 12:15의 대환란 때의 홍수와 관련이 없는 것처럼 창세기 6-8장의 노아의 홍수와도 관련이 없다.

노아와 아담의 상황을 비교하면 현재의 지구가 재창조되었음을 알 수 있다.

① 노아는 지구를 “다시 채운다”(창 9:1, “replenish”).
아담도 다시 채운다(창 1:28, “replenish”).
(NASV를 비롯한 변개된 성경들은 “replenish”라는 단어를 제거했다.)

② 노아는 벌거벗었을 때 죄를 범한다(창 9:21).
아담도 벌거벗었을 때 죄를 범한다(창 3:6).

③ 노아에게는 이름이 언급된 세 아들이 있었다(“셈,” “함,” “야펫”).
아담에게도 이름이 언급된 세 아들이 있었다(“카인,” “아벨,” “셋”).

④ 노아의 아들들 중 한 명은 그리스도의 예표이고(“셈”),
한 명은 저주 아래 있다(“함”).
아담의 아들들 중 한 명도 그리스도의 예표이고(“아벨”),
한 명은 저주 아래 있다(“카인”).

⑤ 노아에게 “땅을 다시 채우라.”는 책무가 주어지기 전에 홍수가 있었다.
아담에게 “땅을 다시 채우라.”는 책무가 주어지기 전에 홍수가 있었다.」

과연 정동수가 이런 진리를 알 수 있겠는가? “영어 사전”의 얕은 물가에서 노는 피라미가 “성경의 심해”를 누비고 다녔던 럭크만 박사와 비교될 수 있겠는가? 럭크만 박사가 어떤 분이신데 “재창조”를 럭크만의 가르침이라고 비난하는가? 일개 기계공학과 교수이면 “본업”에 충실하여 학생들에게 기계공학이나 가르칠 일이지 목회를 “부업” 삼아 누가 만들었는지도 모를 영어 사전이나 뒤적이며 “콩글리쉬” 수준의 가짜 흠정역을 내놓았다. 그런 그가 “160권”이 넘는 진리의 서적들의 저자이자 <킹제임스성경>을 “160번 이상” 읽고 공부한 럭크만 박사를, 죽기 전까지 거리에서 지팡이를 짚고 <킹제임스성경>을 흔들어대며 복음을 전파한, 주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의 말씀을 누구보다도 사랑한 세계 최고의 신학자를 “버릇없이” 공격한 것이다!

이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창세기 1:28의 replenish(다시 채우다)가 히브리어로는 “말레”인데, 이 말레가 “6구절” 앞에서는 fill(충만하라)로 번역되었다는 점이다. 히브리어 “말레”가 왜 “같은 장의 두 구절”에서 다르게 번역되었을까? 제임스 왕 시대에 탁월한 석학이었던 50명의 <킹제임스성경> 번역자들이 고작 “6구절”을 번역하면서 검토하는 중에 실수를 저지른 것인가? 배교한 학자들은 히브리어 표현이 같아도 다르게 번역된 창세기 1:22과 28절을 또다시 문제 삼지만, 두 구절은 분명 그 명령하는 대상이 다르기에 다르게 번역되었을 뿐이다.

① 창세기 1:22, 『다산하고 번성하며 바다의 물들에 충만하라.』
(Be fruitful, and multiply, and fill the waters in the seas)
② 창세기 1:28, 『다산하고 번성하며 땅을 다시 채우고』
(Be fruitful, and multiply, and replenish the earth)

22절의 『충만하라』(fill)와 28절의 『다시 채우고』(replenish) 모두 “말레”에서 번역된 단어들인데, 22절의 “그들”은 동물들이고 이 동물들은 이전의 창조 세계와 아무런 영적 연계점이 없기에 그냥 『충만하라.』라는 명령을 받았다. 반면 28절의 아담은 이전 세상에서 루시퍼와 함께 반역한 천사들, 곧 『하나님의 아들들』(욥 38:7)의 자리를 대신 채워야 했기에 그에게는 “다시 채우라”는 명령이 주어진 것이다! 이것은 창세기 9:1에서 노아의 홍수 이후 그와 그의 가족들에게 『다시 채우라.』(replenish)라고 명령하신 것과 동일한 맥락이다. 홍수 이전 세상이 멸망했으므로 심판으로 비워진 그 땅을 “다시 채우라”고 명령하신 것이다.

성경에 쓰인 특정 단어의 “성경적인 의미”를 아는 데는 사전이 아닌 성경 자체의 내적 증거가 중요하다. 성경의 단어들은 하나님께서 그 단어를 특정 문맥에 사용하신 의도에 따라 성경 내에서 “유기적으로” 해석하여 번역돼야 한다. 정동수는 이 점에 실패한 것이다! 성경 실력도 형편없는 자가 고작 “영어 사전”을 들고서 영어 <킹제임스성경>을 한글로 번역했다고 자화자찬하는 우스운 꼴이 된 것이다. 정동수의 “흠정역”은 “끝없이 깊은 구렁의 왕”(계 9:11)의 명령으로 번역된 것이다. 성경은 스스로 해석하는 살아 있는 책이다(히 4:12). 『성경이 무엇이라고 말하고 있느냐?』(롬 4:3) “영어 사전”으로는 결코 이 질문에 답변할 수 없다. 정동수의 흠정역은 단 한 장도 펼쳐서 볼 가치가 없는 책이다. B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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