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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언받기 원하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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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대로믿는사람들 <2003년 10월호>
오늘날 교회에 다니는 사람 치고, 은사주의 운동을 직·간접적으로 경험해 보지 않은 사람은 아마 없을 것이다. 자기가 직접 방언이나 신유를 경험하지 않았다 해도, 주위에서 벌어지는 은사주의적 행동에 대해서는 많이들 보았을 것이다. 그래도 예전에는 은사주의를 표방하지 않는 교회들이 더러 있었고, 심지어 오순절파 교회들, 예컨대 순복음교회 같은 교회들을 이단이라 말하는 사람들이 더러 있었으나, 요즘에는 대부분의 교회에서 다양한 형태로 나타나는 은사주의 운동을 따라 하고 있다.은사주의 운동은 한마디로 신비주의 현상에다 성경을 잘못 해석하는 것이 가미되어 나온 운동인데, 그 드러나는 현상은 방언, 신유, 입신, 마귀 쫓음(일명 “축사”), 경배와 찬양, 적극적 사고방식, 축복론 등 참으로 다양하다. 하지만 일반적으로 생각할 때 가장 두드러진 현상은 아무래도 방언일 것이다. 어찌 보면 방언이라는 것은 은사주의 운동에 들어가는 “입문”이라고나 할까, 어쨌든 대부분의 사람들이 은사주의 운동에 들어가기 위해 처음 겪는 것이다.
필자 또한 예외가 아니어서, 예전에 은사주의 교회에 다녔던 경험이 있다. 필자가 과거에 다녔던 교회는 순복음교회는 아니었지만, 일 년에 두 번 이상 은사주의적 부흥회를 했고, 또 한동안은 매주 예배 때마다 “통성기도”와 방언을 주로 했었다. 중학교 때에 학생부에서 청평에 있는 「한얼산 기도원」이란 곳으로 수련회를 갔는데, 그때 방언을 받으려고 꽤 노력을 했으나 아쉽게도(?) 방언을 받지 못하고 돌아왔던 기억이 난다. 하지만 결코 포기하지 않는 집념을 갖고 노력한 끝에 고등학교 때 방언을 받게 되었는데, 꽤 유창하게(?) 방언을 했었다.
필자의 경험을 바탕으로, 독자들에게 방언받는 방법을 가르쳐 주겠다. 우선, 나를 압도할 만한 분위기를 가진 집회 혹은 교회에 가라. 큰 군중이 모이는 집회일수록 압도되기가 쉬우나, 그렇지 않다면 밀폐된 공간에서의 집회를 찾아도 좋다. 가능하면 시끄러운 집회가 좋을 것이다. 예전에는 앞에서 부흥강사가 마이크를 대고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는데, 요즘에는 전자 악기와 드럼 등으로 시끄럽게 한다. 그것도 매우 좋은 방법이다. 거기다가 같은 노래를 계속해서 반복해 불러라. 리듬이 일정한 노래면 더 좋다. 이쯤 되면 혼을 압도하기에 충분해졌다. 이제 남은 것은 강사의 멘트다. 앞에서 자극적인 멘트를 주다가 갑자기 빠르게 기도하면, 회중들은 그 분위기에 휩쓸려 소리를 지르게 되고, 기도가 빨라지며, 급기야는 방언이 터져 나오게 된다. 만약 아직 방언받을 만큼 압도되지 않았다면, 같은 말을 반복하라. 예컨대 “주여, 주여...”나 “할렐루야, 할렐루야...”를 반복하라. 아마도 “할렐루야”를 반복하는 것이 효과적일 것이다. 왜냐하면 이 단어에는 “ㄹ(l)” 발음이 세 번씩이나 들어 있는데(hallelujah), 이 말을 빨리 반복해 말하면 누구라도 혀가 꼬이게 된다. 곧이어 당신의 발음은 “할렐루야, 할렐루야...”에서 “랄랄랄...”로 바뀔 것이며, 머지않아 유창한 방언으로 바뀌게 될 것이다.
자, 아마도 이 내용에 공감할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약간의 차이는 있지만 이와 같은 방식으로 방언을 받는다. 다시 말해서 성령의 은사가 아니라 노력에 의해서 받는 방언이라는 것이다. 물론 그 노력이라는 데에는 분위기도 한 몫 하는데, 그 분위기라는 것이 충분히 자기최면, 혹은 집단최면에 이를 만한 분위기이다. 그렇다면 그것은 명백하게 사탄적인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이와 같은 “노력” 없이도 방언을 받는다. 그야말로 “어떤 영에 이끌려”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방언을 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것이야말로 더욱더 위험한 현상으로서, 직접적인 마귀들림의 현상인 것이다.
이러한 현상을 신비주의라고 하는데, 이와 같은 신비주의적 현상은 이방 종교에서도 얼마든지 나타난다. 우리 나라에서 은사주의가 다른 나라에서보다 더 발달된 것은, 우리 민족의 고유한 샤머니즘 신앙이 기독교와 혼합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무엇이든지 신비적인 현상, 초자연적인 현상을 보면 영적인 현상으로 인식을 한다. 타 종교에서 이런 현상이 일어나면 “귀신”의 역사로 보지만, 기독교에서 이런 현상을 보면 “성령”의 역사로 인식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런 현상을 일으키는 영은 동일하다. 그것은 분명히 성령은 아닌 것이다. 왜냐하면 성령님께서는 절대로 성경에 어긋나게 사역하지 않으시기 때문이다.
우리는 성경에서 방언의 정의와 그 행해진 상황에 대해 분명히 깨달을 수 있다. 그러므로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것과 다르게 방언을 하면, 그것은 분명히 마귀의 역사라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이다.
우선, 성경에 나오는 방언은 모두 “외국어”이다. 일단 “방언”(tongue)이라는 말 자체가 단순히 “언어”를 말하는데, 오늘날도 “남부 지방 방언,” “북부 지방 방언”이라는 말을 종종 하는 것을 본다. 그러므로 성경에 나오는 방언은 어떤 지방의 언어, 즉 문맥상 외국어를 말한다.
사도행전 2장에서 사도들은 성령을 받았다. 그런데 그 기간은 오순절이기에 다른 나라에 살고 있는 유대인들이 명절을 지키러 예루살렘에 왔었다. 그들은 히브리어보다는 자기가 살고 있는 지방 언어에 더 익숙한 자들이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집단적으로 복음을 전하기 원하셨다. 그래서 사도들에게 발설케 하셨는데, 그 모인 사람들은 자기 지방 언어로 들었던 것이다. 즉 사도들은 외국어를 한 것이다(행 2:4-11).
당시 제자들은 그리스도의 승천 이후에 약속하신 성령을 받았다는 표적이 필요했다. 그리스도께서 육신으로는 더 이상 그들 곁에 계시지 않으므로, 그들은 성령님과 동행하며, 그분의 능력으로 새롭게 사역을 수행해야 했다. 그때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주신 가장 효과적인 표적이 바로 방언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이방 지역에 복음을 전파해야 했기 때문이며, 또한 유대인들은 표적을 보고야 믿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이다(고전 1:22).
특별히 하나님께서는 유대인들을 깨우쳐 주시기 위해서 방언을 사용하셨다. 방언은 믿지 않는 사람들을 위한 것인데(고전 14:22), 유대인들은 표적을 보고야 믿으므로, 결국 방언이란 믿지 않는 유대인들을 믿도록 하는 도구가 된 것이다.
그 대표적인 사건이 바로 사도행전 10장이다. 하나님께서 환상을 보여 주신 후, 베드로를 코넬료(이방인 백부장)에게 보내셨는데, 베드로가 코넬료에게 복음을 전하자 코넬료와 거기에 모인 이방인들에게 성령이 임하셔서 방언을 하게 된 것이다. 그때까지 사도 베드로는, 구원은 오직 유대인에게만 있는 줄 알았다. 그러나 이방인들도 성령을 받는 것을 보고 분명한 사실을 깨달았으니, 즉 하나님께서는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하신다는 것이다. 후에 베드로는 사도행전 15:7-11에서 이 사실을 증거한다. 이 경우 “믿지 않는 유대인”은 베드로였다. 무엇을 믿지 않았는가? 이방인이 구원받고 성령을 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믿지 않았다. 이때 하나님께서는 “방언”이라는 표적을 통해서 베드로를 깨우쳐 주셨던 것이다. 코넬료가 그후에 방언을 계속 했는지 안했는지는 중요치 않다. 코넬료가 방언한 것은 오직 “믿지 않는 유대인”인 베드로를 일깨워 주는 데 목적이 있었던 것이다.
초대 교회에서는 이러한 일들이 종종 있었을 것이다. 그러는 가운데 부작용이 일어난 곳이 바로 고린도 교회였다. 고린도 교회는 워낙 육신적인 교회였기 때문에, 약간의 은사만 있어도 서로 자랑하곤 했다. 그들 중에 방언을 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런데 그들은 그 방언을, 하나님이 주신 은사이기에 자랑하려고만 했던 것이다. 그러다 보니, 집회의 자리에서 너도 나도 방언을 할 수 있다고 떠벌리게 되었다. 마침 고린도 지역은 그리스 지역들 중에서도 우상 숭배와 더불어 도덕적 문란이 매우 심했던 곳인데, 고린도 교회 회원들 중에는 이방의 신전에 출입하던 사람들도 종종 있었다(고전 8:10).
상황이 이렇다 보니, 그들의 육신적인 모임은 더 심화되었고, 사도 바울은 그들을 책망하며 바로잡아야 할 필요가 있었다. 고린도전서에서 사도 바울은 육신적 분열 문제(1장), 음행 문제(5장), 우상에게 바쳐진 제물에 관한 문제(8장), 여자들이 머리에 수건을 쓰는 문제(11장), 주의 만찬 문제(11장), 은사들에 관한 문제(12장) 등, 참으로 여러 가지 문제들에 관해 책망하며 지침을 주고 있는 것이다.
그 중에 방언 문제를 다루고 있는 부분이 바로 고린도전서 14장이다. 오늘날 은사주의자들은 사도행전 2장과 고린도전서 14장을 통해 자기들의 교리를 세우고 있지만, 14장을 차분하게 읽어 보면, 사도 바울이 방언을 하라고 권면하는 것이 아니라, 방언을 하지 말라고 권면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너희도 마찬가지라. 만일 너희가 방언으로 쉽게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한다면 무슨 말을 하는지 어떻게 알 수 있겠느냐? 이는 너희가 허공에다 말하고 있는 것이라』(고전 14:9).
사도 바울은 자기가 다른 사람보다 많은 방언들을 말한다고 했다(18절). 참으로 그렇다. 바울은 히브리인이므로 히브리어를, 당시 그 지역의 언어인 아람어를, 신약성경을 기록했으므로 헬라어를, 로마 시민권을 가졌으니 라틴어를 사용할 줄 알았다. 또한 여러 지역들을 다니며 복음을 전했는데, 그때마다 의사소통에 문제가 생긴 적이 없었다. 그는 참으로 “많은 방언들”을 말한 사람이다. 은사주의자들처럼 “할렐루야, 주여, 랄랄라”를 반복해서 방언받은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또한 바울은 영으로도 기도하고 지각으로도 기도한다고 했다(15절). 여기서 영으로 기도한다는 것은 방언으로 기도한다는 말이 아니다. 요한복음 4:23,24에서 그리스도께서는 영과 진리로 경배하라고 말씀하셨는데, 이때 영으로 경배한다는 것이 방언하며 경배하는 것을 말하는가? 당연히 아니다. 이것은 거듭난 사람이 영적으로, 성령충만으로 경배하라는 말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영이시기에 육신적인 경배는 받지 않으시기 때문이다. 육신의 입으로만 기도한다고 하나님께서 그 기도를 받으시겠는가? 어느 나라 말로 드리는 어떠한 기도라 할지라도 무릇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기도는 영으로 하는 기도인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한국말을 사용하면서 “영으로” 기도한다. 오히려 은사주의적인 방언으로 기도하는 것이 육신으로 기도하는 것이다. 그것은 당연히 하나님께서 받지 않으신다.
자, 이럼에도 불구하고 방언을 하고 싶은 사람이 있는가? 그렇다면 그렇게도 좋아하는 고린도전서 14장의 원리에 따라 방언하라.
첫째, 방언을 하려면 차례대로 돌아가면서 하고, 꼭 통역을 동반하라(27절). - 은사주의 집회에서는 절대로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이 구절은 외국 선교사가 외국어로 설교하려면 통역이 필요하다는 말이다.
둘째, 교회에서는 방언하지 말라(19절). - 역시 은사주의 집회와 반대되는 원리다.
셋째, 여자들은 절대로 방언하지 말라(34절). - 여자들이 조용히 하라는 말은 교회에서 아무 말도 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문맥적으로 방언과 예언(신약적으로는 설교)을 하지 말라는 것이다. 하지만 은사주의 집회에서는 보통 남자들보다 여자들이 더 많이 방언한다.
그래도 방언의 은사를 받고 싶다면, 차라리 언어적 감각을 달라고 기도하라. 어차피 방언은 외국어를 말한다. 하나님께서 성도들에게 주시는 은사는 다양하다. 그리고 은사를 주시는 목적은 교회를 섬기도록 함이다. 어떤 사람은 아무리 열심히 외국어 공부를 해도 잘 되지 않는 사람이 있는 반면, 어떤 사람은 조금만 노력해도 외국어를 잘 습득하는 사람이 있다. 그 능력이 하나님의 교회를 위해 사용된다면 은사가 될 것이다. 그런 사람들은 선교를 할 수도 있고, 좋은 책이나 설교를 번역해서 성도들에게 도움을 줄 수도 있다. 필자가 아는 형제들 중에도 이러한 은사가 있는 사람이 종종 있다. 이 시대에 방언의 은사를 굳이 말한다면, 바로 이런 것을 두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누군가가 방언의 은사를 받기 원한다면, 언어적 감각을 달라고, 언어를 빨리 습득할 수 있게 해 달라고 기도하라. 그 목적이 선하다면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들어 주실 것이다.
이처럼 성경은 은사주의자들이 하는 이상한 방언을 금지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방언을 하는 것은 비성경적일 뿐 아니라, 악령의 인도를 받는 것이다. 이러한 마귀적인 교리는 서로 다른 교리를 표방하는 교단들을 하나로 묶는 역할을 한다. 과거에는 서로 교리가 다르다고 갈라지며 싸웠지만, 이제는 너도나도 방언을 하고 “성령을 체험”했으니 연합하는 것이다. 결국 은사주의의 영은 에큐메니칼의 영이기도 하다. 실제로 로마카톨릭은 은사주의를 통해 개신교와 하나가 되려는 노력을 하고 있다.
은사주의가 이 땅에서 사라질 날은 언제인가? 아마도 우리 주님께서 다시 오실 때까지 그런 날은 오지 않을 것이며, 오히려 더 심해질 것이다. 이 마귀적인 교리는 적그리스도가 자기 세상을 펼칠 때에 십분 활용할 수 있도록, 지금도 그 길을 꾸준히 예비하고 있는 것이다. B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