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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실한 파수꾼으로 발견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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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대로믿는사람들 <2018년 07월호>
소위 "오병이어"의 기적이 일어난 후, 사람들이 억지로 데려다가 왕으로 삼으려 하자 주님께서는 홀로 산으로 가신다. 『저녁 때가 되어 제자들이 바다로 내려가서 배를 타고 카퍼나움을 향하여 바다를 건너가는데, 날이 이미 어두워졌으나, 예수께서는 아직 그들에게로 오시지 아니하더라』(요 6:16,17). 이 장면만 보아서는 산으로 가신 주님께서 아직 오시지 않는 까닭을 알 수 없으나, 같은 장면을 묘사하고 있는 마태복음을 보면 그 이유를 비교적 소상히 알 수 있다. 『그리고 나서 곧 예수께서 제자들을 재촉하여 배를 타고 먼저 건너편으로 가게 하시고, 그 동안 주께서는 무리를 보내시더라. 무리를 보내신 후 주께서는 기도하러 따로 떨어져 있는 산으로 올라가셨는데, 저물었을 때에 거기에 홀로 계시더라』(마 14:22,23). 우리는 여기서 주님께서 제자들에게로 오시지 않은 이유가, 자신을 왕으로 삼으려 하는 사람들을 피해 혼자 산에 올라가셔서 아버지 하나님께 기도를 드리는 일 때문이었음을 알게 된다.『날이 이미 어두워졌으나, 예수께서는 아직 그들에게로 오시지 아니하더라.』 언뜻 보면 이 구절은 단순하고 평범한 서술같이 보인다. 그러나 이 구절이 암시하는 바를 알고 나면, 이 구절만큼 의미심장한 구절도 드물다는 사실에 동의하게 된다. 날은 이미 어두워졌다. 지금 제자들은 배를 타고 카퍼나움을 향하여 갈릴리 바다를 건너가고 있다. 그런데 정작 예수님께서는 그들과 함께 계시지 않는다. 우리는 이 상황에서 우리 역시 어두운 밤바다를 건너가고 있다는 동류의식을 느낄 수 있다. 왜냐하면 어두운 밤이 2천 년간의 교회 시대를 암시하고 있다면, 카퍼나움을 향해 배를 저어 가는 제자들이야말로 주님의 다시 오심을 사모하며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우리들의 모습이기 때문이다.
『바다에 강풍이 불므로 파도가 일더라』(요 6:18). 이 부분이 마태복음에서는 보다 더 구체적으로 묘사되어 있다. 『한편 그 배는 이제 바다 한가운데 있었는데, 바람이 거슬러 불므로 파도에 시달리고 있더라』(마 14:24). 그러니까 제자들은 지금 갈릴리 바다 한가운데 거슬러 부는 바람 속에서 높은 파도에 시달리고 있는 것이다. 바람은 더욱 강해지고 파도가 점점 더 거세게 뱃전을 때린다. 어떤가, 더도 말고 덜도 말고 현재 우리의 처지가 영락없이 그와 똑같다는 느낌이 들지 않는가? 그렇다! 지금 우리는 교회 시대, 곧 거슬러 부는 바람에 풍랑이 일어서 금방이라도 타고 있는 배가 뒤집힐 것 같은 어두운 밤바다 한가운데 있다. 산 위에서 기도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은 현재 셋째 하늘에서 성도들을 위해 중보하고 계시는 대제사장으로서의 좋은 그림이며, 현 시대는 칠흑 같은 밤중으로 바람은 항상 맞은편에서 거세게 불어와 성도들을 괴롭히고 있는 것이다.
주님께서는 인간적인 안목으로 볼 때 위기라고 해서 미리 정해 놓으신 때를 앞당기거나 미루는 분이 아니시다. 주님께서는 시간과 공간의 주인이시므로 자신의 때에 정확히 나타나신다. 주님의 다시 오심을 두고 성경은 『그 날과 시간에 관해서는 아무도 모르나니, 정녕 하늘에 있는 천사들도 모르고 아들도 모르며 오직 아버지만 아시느니라. 너희는 주의하여 깨어 기도하라. 이는 너희가 그 때가 언제인지 모르기 때문이라.』(막 13:32,33)라고 말씀하신다. 그러면서 네 가지 경점을 제시하신다. 『그러므로 깨어 있으라. 그 집주인이 언제 올는지, 저녁일는지, 밤중일는지, 닭이 울 때일는지, 아니면 아침일는지 너희가 모르기 때문이라』(막 13:35). 여기서 "저녁"(첫 번째 경점)은 6 - 9시로 A.D. 30 - 500년에 해당하고, "밤중"(두 번째 경점)은 9 - 12시로 A.D. 500 - 1000년, "닭이 울 때"(세 번째 경점)는 12 - 3시로 A.D. 1000 - 1500년, "아침"(네 번째 경점)은 3 - 6시로 A.D. 1500년 - 휴거의 기간에 해당한다. 일곱으로 일하시는 하나님의 경륜으로 볼 때, 현재 시간은(우리가 사용하는 달력을 기준으로) 일곱 번째 천 년에 들어선 지도 벌써 18년째에 도달한 시점이므로 네 번째 경점의 최말미에 다다라 있는 셈이다. 여유 시간이 그리 많이 남아 있지 않은 것이다.
그런데 성경은 더 늦지도 더 빠르지도 않게 나타나시는 주님을 이렇게 묘사한다. 『밤 제사경에 예수께서 바다 위를 걸어서 그들에게 다가오시니』(마 14:25). 같은 대목을 요한복음은 좀 다르게 묘사하고 있다. 『그때 그들이 노를 저어 이십오 내지 삼십 스타디온쯤 갔을 때, 예수께서 바다 위로 걸어서 배로 다가오시는 것을 보고 두려워하더라』(요 6:19). 1스타디온(펄롱)은 약 200미터이므로 30스타디온은 6킬로미터 정도에 해당하는 거리이다. 주님의 제자들이 노를 저어, 그것도 마주 불어오는 강풍 속을 거슬러 6킬로미터 정도나 이동했다는 것은 이른 저녁부터 새벽 제사경까지 그야말로 상당히 먼 거리를 악전고투했음을 보여 준다.
『파수꾼아, 밤이 어떻게 되었느냐?』(사 21:11) 여기에서 파수꾼은 예수님 당시로 보면 바람을 거슬러 풍랑과 싸웠던 제자들에 해당한다. 그러나 교회 시대 막바지인 현시점으로 보면 이 파수꾼은 그리스도를 대신한 대사들(고후 5:20), 곧 성경대로 믿는 사람들과 다름없다. 파수꾼은 자신을 파수꾼으로 세워 주신 분을 위해 언제 어디서든 힘차게 나팔을 불어야 한다. 이에 성경은 『그가 나팔 소리를 듣고 경고를 받아들이지 아니하면 그의 피는 그의 머리로 돌아갈 것이나 그 경고를 받아들이는 자는 그의 생명을 구할 것이라.』(겔 33:5)라고 말씀한다. 그런데 파수꾼에게는 더욱 막중한 책임이 있다. 『그러나 그 파수꾼이 칼이 임하는 것을 보고서도 나팔을 불지 않아 백성들이 경고를 받지 못하여 칼이 임하여 그들 가운데 어떤 사람을 제거하게 되면 그는 그의 죄악 중에서 제거되지만 그의 피는 내가 파수꾼의 손에서 구할 것이니라』(겔 33:6). 보는 것처럼 파수꾼 자신이 나팔을 불지 못하여 누군가가 피해를 입는다면, 하나님께서는 파수꾼의 손에서 그 피를 요구하시는 것이다. 이 얼마나 엄중한 경고인가!
나라가 공산화되면 신앙의 자유가 없어질 것은 불문가지(不問可知)이다. 그러나 공산주의의 무서움을 모르는 젊은이들은 우리나라를 피땀 흘려 건설한 어른들을 소위 고리타분한 "꼰대들"이라고 매도하면서 북쪽 공산주의에 우호적인 세력을 일방적으로 편들고 있다. 정말 기이한 현상으로 우리나라로서는 건국 이래 최대 위기가 아닐 수 없다. 그러나 "공의를 행하고 진리를 구하는 한 사람만 있어도 그 성읍을 용서하시리라."(렘 5:1)라는 약속이 아직도 퍼렇게 살아 있거늘, 6백 명 안팎의 성경대로 믿는 사람들이 건재해 있는 이 나라를 하나님께서 허망하게 버리실 리는 만무하다. 중요한 관건은 성도들이 어둡고 험악한 현 세상에서 주님께서 맡기신 일을 얼마나 의연히, 또 신실하게 감당하느냐에 달려 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때가 되면 자신의 소중한 신부를 데려가시려고 홀연히 오실 것이다. 『샛별』(day star, 벧후 1:19)이자 『새벽별』(계 22:16), 곧 아침의 별(morning star)이신 주님께서는 바다(깊음)를 건너오시는 즉시 『나니, 두려워 말라.』(요 6:20)라고 위로하시며 우리를 셋째 하늘로 옮기실 것이다. 밤이 어두울수록 아침은 가까운 법이다. 더 열심히 말씀을 읽고 더 열심히 기도하도록 하자. 그리고 더욱 넘치게 주님의 일을 하자!
큰 파도 밀려오는 밤바다 한가운데
날이 이미 어두워졌으나, 예수께서는 아직 그들에게로 오시지 아니하더라 - 요한복음 6:17 -
1
큰 파도 밀려오는 밤바다 한가운데
믿음의 배를 타고 노 젓는 성도들아
아침 해 돋을 때가 시시각각 다가온다
어둡다 겁먹지 말고 더욱 힘을 내어라
2
빛 한 점 뵈지 않는 밤바다 한가운데
말씀의 등을 켜고 노 젓는 성도들아
깊음과 별을 넘어 우리 주님 곧 오신다
풍랑을 두려워 말고 더욱 힘을 내어라
3
무서운 파도 소리 밤바다 한가운데
성령의 인도 속에 노 젓는 성도들아
이제 곧 날이 새어 아침의 별 떠오른다
소망의 주님을 향해 더욱 힘을 내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