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진리의 말씀을 올바로 나누어 자신이 하나님 앞에 부끄럽지 않은 일꾼으로 인정받도록 공부하라(딤후 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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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인은 결코 흔들리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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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대로믿는사람들 <2018년 10월호>

시편 55편은 『느기놋에 맞추어 악장에게, 마스킬, 다윗의 시.』가 그 표제이다. 즉 "현악기에 맞추어" 노래하는 "묵상"이라는 뜻이다. "다윗의 시"인 본 시편은 1. 공포로 덮인 환란 성도(1-8절), 2. 짓밟히는 예루살렘(9-11절), 3. 환란 성도의 실제적인 대적(12-15절), 4. 구원을 위한 기도(16-19절), 5. 언약을 파기하고 전쟁을 획책하는 원수(20,21절), 6. 짐을 주님께 맡겨 드림(22절), 7. 인생의 절반도 살지 못하고 멸망의 구덩이로 내려갈 원수들(23절)로 구성되어 있다.

『오 하나님이여, 나의 기도에 귀를 기울이시고 나의 간구로부터 자신을 숨기지 마소서. 내게 주의를 기울이시고 내게 들으소서. 내가 슬픔으로 편치 못하여 탄식하오니, 이는 원수의 음성과 악인의 압제 때문이니이다. 그들이 내게 죄악을 던지며 진노로 나를 미워하나이다. 내 마음이 내 안에서 심히 아파하며 사망의 공포가 내 위에 떨어졌나이다. 두려움과 떨림이 내게 임하였고 공포가 나를 덮었나이다』(1-5절). 본 시편은 슬픔으로 편치 못하여 탄식하는 성도의 간절한 간구로 시작된다. 원수의 음성과 악인의 압제 때문에 그런 것인데, 그들이 던지는 죄악과 진노로 마음은 심히 아파 오고, 사망의 공포가 두터운 바다 안개처럼 화자를 에워싼다. 오도 가도 못한 채 언제 죽을지 모른다는 두려움에 사지가 전율한다. 음습한 밤공기처럼 내려앉은 공포는 한 인간으로서의 환란 성도를 구석에 몰아넣기에 충분하다. 짐승의 표를 거부한 이들을 향해 떨어진 처형 명령은 분명 사망의 공포로 다가올 것이다. 『또 그가 짐승의 형상에게 생명을 주는 권세를 받아 그 짐승의 형상으로 말도 하게 하고, 그 짐승의 형상에게 경배하지 아니하는 자는 다 죽이도록 하니라』(계 13:15). 적그리스도가 치명적인 상처에서 살아나자(계 13:3,12), 전 세계는 위협과 공포의 도가니로 전락한다. 눈에 잘 띄는 오른손이나 이마에 표를 받지 않는(계 13:16) 이들에게는 언제 어디서든 체포와 죽음이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공포... 공포 그 자체인 것이다!

인생에서 공포의 요소는 다양한데, 전염병, 실직, 파산, 태풍, 지진, 기근, 전쟁의 공포 등이 있는 것이다. 박해당하는 성도에게는 고문의 공포가 있다. 밀폐된 공간의 탁한 허공을 가르며 후려치는 곤봉, 맨살을 지져 대는 인두, 살을 저미는 칼날, 뼈를 꺾는 손아귀, 비명, 무섭게 뛰는 심장, 땀구멍을 화끈거리게 하는 온몸의 진땀, 실신, 끼얹어지는 찬물, 정신의 깨어남, 날개라도 있다면 고문실을 벗어나 저 멀리 아무도 없는 곳에 날아가 안식하고 싶은 부질없는 갈망... 이 모든 것이 "사망의 공포"와 다름없으니 환란 성도들 또한 그러할 것이다. 『내가 말하기를 "오 내게 비둘기처럼 날개가 있다면! 그러면 내가 멀리 날아가 안식하리라. 보라, 그러면 내가 멀리 달아나 광야에서 거하리라. 셀라. 내가 폭풍과 광풍에서 빨리 피하리라." 하였나이다』(6-8절).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비둘기 날개 대신 "큰 독수리의 날개"를 주시어 광야로 피신하게 하실 것이다(계 12:14). "비행기"를 타고 셀라 페트라로 도피한 그들을 주님은 1,260일 동안 초자연적으로 부양하실 것이다(계 12:6). 즉 출애굽 때 광야의 이스라엘을 부양하신 것처럼 하늘에서 일용할 양식을 날마다 공급해 주실 것이다(미 7:14,15, 마 6:11).

『오 주여, 멸하시고 그들의 혀들을 가르소서. 이는 내가 성읍 안에서 폭력과 분쟁을 보았음이니이다. 그들이 밤낮으로 성벽 위를 돌아다니니 그 성읍 가운데 또한 재난과 슬픔이 있나이다. 사악이 그 가운데 있으며 기만과 교활이 그 거리에서 떠나지 아니하나이다』(9-11절). 이것은 대환란 때 짐승에게 마흔두 달 동안 짓밟힐 예루살렘의 모습이다(계 11:2). 그때 그 도성은 밤낮으로 폭력과 분쟁, 재난, 슬픔, 사악, 기만, 교활로 가득할 것이다. 처음부터 살인자였으며 거짓말쟁이요 거짓말의 아비인(요 8:44), 모든 교만의 자식들을 다스리는 왕이(욥 41:34) 죄의 사람으로 육화하여 성읍을 파괴시킬 터이니 결코 피할 수 없을 것이다. 그에게서 어떤 선한 것이 나올 수 있겠는가. 예루살렘은 영적으로 소돔과 이집트라 불리는 곳이며, 우리 주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곳이다(계 11:8). 소돔의 음행과 세상의 죄악이 농축되어 있는 그 도성, 자기들의 메시아를 십자가에 못 박히게 한 도성이 맞게 될 그 운명은, 아버지의 이름으로 오신 그리스도를 거부하고 자기 이름으로 오는 적그리스도를 영접한(요 5:43) 결과인 것이다.

비록 그렇다 할지라도 예루살렘은 여전히 하나님께 『거룩한 도성』(계 11:2)임을 잊지 말라. 주님께서는 그곳을 결코 잊지 않으시고 "두 증인"을 보내시어 원수들과 싸우게 하실 것이다(계 11:3-7). 비록 대환란 끝에 짐승에게 죽임을 당할 테지만(계 11:7), "모세와 엘리야"는 주님께서 예루살렘을 다시 택하시기 위해 그분의 거룩한 처소에서 일어나실 때까지(슼 2:12,13) 예루살렘을 위해 싸울 것이다.

『나를 비난하는 자는 원수가 아니었으니 그랬더라면 내가 참을 수 있었으리라. 나를 대적하여 자신을 높인 자는 나를 미워하던 자가 아니었으니 그랬더라면 내가 그를 피하여 숨었으리라. 그러나 그는 바로 너로다. 나와 같은 사람이요, 나의 안내자요, 나의 벗이로다. 우리가 함께 다정하게 의논하였으며 하나님의 집에 사람들과 함께 다녔도다. 사망으로 그들을 덮치게 하고 그들을 산 채로 지옥으로 내려가게 할지라. 이는 사악함이 그들의 처소와 또 그들 가운데 있음이라』(12-15절). 이 말씀은 환란 성도들이 가까운 혈육과 가족에게 박해당하는 일에 적용될 수 있지만(마 10:21-23), 초림 때의 예수 그리스도께 보다 밀접하게 적용된다. 본문의 화자를 박해한 "너"는 "나와 같은 사람이요, 나의 안내자요, 나의 벗"이다. 화자와 "너"는 함께 다정하게 의논했으며 하나님의 집에 사람들과 함께 다녔다. 말하자면 "유다 이스카리옷"은 마귀가 육화한 "사람"이었으며(요 6:70,71), 예수 그리스도를 갈보리로 인도한 잘못된 안내자였다("길잡이" - 행 1:16). 주님은 그를 벗, 곧 "친구"라고 부르셨다(마 26:50). 유다는 이스라엘의 모든 남자들이 성전에 가야 하는 명절날들에(신 16:16, 요 11:56; 12:12) 주님께서 성전에서 강론하시던 자리에 있었으므로(막 11-13장) 주님과 함께 『하나님의 집』에 다닌 것이 확실하다. 본문 12-15절은 예수 그리스도와 유다 이스카리옷에 대한 예언임이 분명한데, 문제는 15절에 있다. 『사망으로 그들을 덮치게 하고 그들을 산 채로 지옥으로 내려가게 할지라. 이는 사악함이 그들의 처소와 또 그들 가운데 있음이라.』 13절의 『너』가 갑자기 15절에서 『그들』(복수형)로 바뀐다. 유다 이스카리옷은 "멸망의 아들"이며(요 17:12, 살후 2:3), 욥기에서는 "아들 사탄"인 "비히못"으로 등장한다(욥 40장, "아버지 사탄"은 욥기 41장의 "리비야단"이다). 비히못은 "짐승들"이라는 뜻의 히브리어로, 요한계시록 13:2은 이 짐승이 "표범, 곰, 사자"로 이뤄진 "복합 짐승"임을 밝혀 준다. 이처럼 비히못이 멸망의 아들로서 나타나게 될 존재와 동일 인물인 유다 이스카리옷은 한 사람("너")이면서 복합 짐승("그들")으로도 설명될 수 있는 신비의 인물이다. 초림 때 예수 그리스도와 같은 사람이요 안내자요 벗이었던 그가 재림 때 멸망하게 될 바로 그 복합 짐승임을 시편 본문은 밝히 보여 주고 있는 것이다.

『나로 말하면 나는 하나님을 부르리니 그리하면 주께서 나를 구원하시리라. 저녁과 아침과 정오에 내가 기도하며 큰 소리로 부르짖으리니 그리하면 그가 내 음성을 들으시리라』(16,17절). 하나님께서는 성도가 부를 때 응답하는 분이시다. 바알의 선지자들이 아침부터 저녁 희생제를 드릴 때까지 부르짖어도 그들의 신은 응답이 없었다(왕상 18:26-29). 그러나 엘리야의 하나님은 그분의 불을 내리시어 번제물과 나무와 돌들과 흙을 태우고 도랑에 있는 물을 핥아 버리게 하셨다(왕상 18:38). 돌들과 흙을 태울 정도로 강력한 불이었던 것이다! 자신을 부르라 하셨고, 그러면 응답하겠다고 하신 분을 하나님으로 모시고도 그분께 기도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성도의 생애에서 일어날 수 있는 가장 모순된 일이다. 그것은 『나를 부르라. 그리하면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능력 있는 일들을 네게 보이리라.』(렘 33:3)라고 하신 분의 초청과 자신감을 비웃는 것과 같다. "기도는 무슨 기도, 응답은 무슨 응답이냐"라고 냉소하는 것과 같다. 다니엘은 대적들을 두려워하지 않고 예전에 하던 대로 "하루에 세 번씩"(단 6:10), 곧 본문의 『저녁과 아침과 정오에』 무릎을 꿇고 기도하였는데, 하나님께서는 그 일로 사자 굴에 던져진 그 기도의 사람을 맹수들의 입에서 구해 주시는 크고 능력 있는 일을 보이셨다. 하나님께서는 기도하는 성도를 그렇게 구해 주시는 분이라고 시편 기자도 노래한다. 『그는 나를 대적하는 전쟁으로부터 평안 가운데 내 혼을 구해 내셨으니 이는 나와 함께한 자가 많았음이라』(18절). 다니엘을 구해 주신 주님은 도리어 그의 고소자들과 가족들을 사자 굴에 던져지도록 하셨으며, 『사자들은 그들이 미처 굴 바닥에 닿기도 전에 그들을 움켜서 그들의 모든 뼈들을 산산조각내어』 부수어 버렸다(단 6:24).

『하나님께서 들으시고 그들에게 고통을 주시리니 그는 예로부터 계신 분이시라. 셀라. 그들에게는 변화가 없으므로 그들이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아니하는도다』(19절). 『예로부터 계신 분』께서는 변화가 없으시다(히 13:8, 약 1:17). 그래도 그분께는 아무런 문제가 발생하지 않으나, 사람의 인생에는 변화가 없으면 문제가 일어난다. 『어리석은 자들의 번영은 그들을 멸망시키느니라』(잠 1:32). 실망과 좌절과 몰락과 사면초가를 맛보면서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을 배우면 그분을 찾고 구원받게 되지만, 계속 번영하기만 하는 악인의 인생은 그의 멸망을 초래할 뿐이다. 이 점은 성도의 인생도 예외가 아니다. 성도에게 고난을 허락하시는 것은 하나님을 찾으라는 메시지인데, 문제없고 고난이 없는 인생만을 구한다면 하나님을 찾지 않아도 되는 삶을 바라는 것과 다를 바 없게 된다. 하나님께서는 잠깐의 고난 뒤에 우리를 온전케 하시고, 견고케 하시며, 힘을 주시고, 확고히 하시는 분이다(벧전 5:10). 바로 이 점을 놓치면, 그는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많은 것을 잃게 되며,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 칭찬과 존귀와 영광을 받을 수도 없게 된다(벧전 1:6,7). 고난은 성도의 특권이다.

이후로 본 시편은, 거짓으로 화목했던 유대인들을 대항해 『그의 언약을 파기하』는(20절, 단 9:27), 버터보다 매끄럽고 기름보다 부드러운 말로 속이며 전쟁을 획책하는 적그리스도의 모습을 예언한다(21절). 이처럼 속이는 부드러운 말은 뽑힌 칼이다! 이런 시기를 통과해야 할 환란 성도들에게 『너의 짐을 주께 맡기라. 그리하면 그가 너를 붙드시고 의인이 흔들리는 것을 결코 허락하지 아니하시리라.』(22절)라고 하시는데, 이 점은 우리에게도 동일한 위로를 준다. 인생의 짐을 주님께 맡기면, 주님은 우리가 흔들리는 것을 결코 허락하지 않으실 것이다! 하나님을 부르라는데 부르지 않는 것이나, 짐을 맡기라는데 맡기지 않는 것이나 아무런 차이가 없다. 말씀을 냉소하며 무시하는 인생에 먹장구름은 걷힐 날이 없다.

『그러나, 오 하나님이여, 주께서 그들을 멸망의 구덩이로 데려가시리니 피흘리기를 좋아하고 속이는 자들은 그들의 날의 절반도 살지 못하리이다. 그러나 나는 주를 신뢰하리이다』(23절). 대환란 때의 죄인들은 7년 동안 대재앙으로 죽을 것이기에 수명을 다 채우지 못하게 된다. 그러나 주를 신뢰하는 환란 성도들은 천신만고 끝에 환란을 통과하여 천년왕국에 들어간다. 주님은 그 의인들이 흔들리는 것을 결코 허락하지 않으시고, 그분의 왕국으로 안전하게 인도하시는 것이다. B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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